감각으로 기억하는 사랑의 흔적
오렌지
- 김상미
시든, 시드는 오렌지를 먹는다
코끝을 찡 울리는 시든, 시드는 향기
그러나 두려워 마라
시든, 시드는 모든 것들이여
시들면서 내뿜는 마지막 사랑이여
삶이란 언제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에도
남아 있는 법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나는 내 사랑의 이로
네 속에 남은 한줌의 삶
흔쾌히 베어먹는다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예요》, 문학동네, 2017.
시인이자 박물학자이자 정원사인 다이앤 에커먼(Diane Ackerman)이 쓴 <감각의 박물학>은 “세상은 얼마나 황홀하고 감각적인가”라는 인상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해 오감(五感)의 드넓은 세계를 박학(博學)으로 종횡한다. 그녀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책이 ‘작은 축제’가 될 것이라고 일러준다. 그 축제의 서막은 후각에서 시작해 촉각, 미각, 청각, 시각의 영역을 거쳐 공감각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러한 순서와 배치는 상당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냄새의 뇌관을 건드리면 모든 추억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는 그녀의 진술은 후각이 지닌 위력을 잘 설명해준다. 냄새는 아주 깊은 밀도를 지니고 있으며, 물리칠 수 없는 유혹들을 내뿜는 감각의 샘이다. 냄새 맡는 자는 대상을 만지게 되고 결국엔 맛보게 된다. 세상의 모든 유혹과 사랑의 서사는 이러한 감각의 농밀한 과정을 거치는 듯하다. 그렇지만 그러한 감각의 황홀도 시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시간은 모든 감각을 낡고 시들게 만든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과거의 황홀을 회고하는 현재의 향수(鄕愁)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김상미 시인의 시 <오렌지>는 떠나는 것과 떠나가려는 모든 것들이 내뿜는 아쉬움의 정서를 ‘흔쾌히’ 맞닥뜨리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재구성하려는 의지를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깊은 인상을 남긴다. ‘시든, 시드는 오렌지’를 먹는 것에서 느껴지는 미각의 세계는 모든 추억이 입안에서 일시에 터지는 회고의 아득함일 것이다. 화자가 맛보는 오렌지의 맛은 시고, 달고, 과즙이 넘쳐나 온 몸을 상쾌히 떨게 하는 그런 맛이 아니라 ‘코끝을 찡 울리는’ 심금의 맛과 향기로 표현되고 있다. 시간의 흐름 앞에서 모든 것들은 이미 시들었거나 시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예견된 것이자 피할 수 없는 실존의 운명일 것이다. 그러한 실존의 가혹을 시인은 “삶이란 언제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에도/남아 있는 법”이라는 지극한 성찰을 통해 극복하려한다. 시간이 흘러도 소멸되지 않는 어떤 ‘기억들’은 ‘마지막’으로 표현된 시간의 단절을 영속화함으로써 실존의 허무를 극복하는 새로운 발판이 된다. ‘오렌지 향기’가 바람에 다 날아가도 “나는 내 사랑의 이”로 오렌지 속에 남아있는 ‘한줌의 삶’을 ‘흔쾌히’ 맛보겠다는 화자의 의지는 그 모든 것들이 내 곁을 떠난다 해도 나는 나의 감각과 기억으로 떠나간 모든 것들의 맛과 향기를 간직하겠다는 실존적 결단일 것이다. 황홀의 감각을 기억함으로써 시간은 충일해지고 사랑의 흔적은 숭고해진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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