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단양 적성산성과 신라 척경비

‘사통팔달 군사 요충지’ 놓고 삼국시대 치열한 전투

현대에 복원된 적성산성 : 원래 신라의 축성술은 엉성했을 것이며, 위, 수, 당 등 중원군(中原軍)과 간단(間斷)없이 대치하던 고구려는 일찍부터 축성술이 발달했을 것이다. 수세 일변도였던 신라가 고구려 산성을 공격해 점령하면서 고구려의 선진 축성술을 배워 축성에 적용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통일 후에 대당 전쟁을 치를 때도 신라는 고구려 유민의 전투력과 축성 등 전문성을 중용했다.
현대에 복원된 적성산성 : 원래 신라의 축성술은 엉성했을 것이며, 위, 수, 당 등 중원군(中原軍)과 간단(間斷)없이 대치하던 고구려는 일찍부터 축성술이 발달했을 것이다. 수세 일변도였던 신라가 고구려 산성을 공격해 점령하면서 고구려의 선진 축성술을 배워 축성에 적용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통일 후에 대당 전쟁을 치를 때도 신라는 고구려 유민의 전투력과 축성 등 전문성을 중용했다.

단양은 연단조양(鍊丹調陽)의 가취(佳趣)에서 시작됐다고 단양군청 홈페이지는 소개한다. 연단은 신선이 먹는 환약이며 조양은 햇볕이 골고루 따뜻하게 비춘다는 뜻이니, 신선이 다스리는 따뜻한 고장이란 뜻이다. 삼국시대 고구려 때는 적산(赤山) 또는 적성(赤城)이라 불렸고, 고려 초 단산(丹山)현을 거쳐 고려말 충숙왕 때부터 ‘단양’이라는 지명을 쓰기 시작했다.

단양 신라 적성비 : 가로 세로가 엇비슷한 돌에 400여개의 글자가 가지런하게 새겨져 있는데, 그 가운데 288글자를 해독했다. 영민한 지도자인 진흥왕 때, 오랜 숙원인소백산맥을 넘어 군사 요충지인 단양을 점령하고, 승리를 만끽하는 신라인들의 호기로움이 곳곳에 드러난다. 김춘추와 함께 삼국통일의 최대 공신인 김유신의 조부며 금관가야의 왕자 출신인 무력의 이름이 귀족 가운데 세 번째로 보인다.
단양 신라 적성비 : 가로 세로가 엇비슷한 돌에 400여개의 글자가 가지런하게 새겨져 있는데, 그 가운데 288글자를 해독했다. 영민한 지도자인 진흥왕 때, 오랜 숙원인소백산맥을 넘어 군사 요충지인 단양을 점령하고, 승리를 만끽하는 신라인들의 호기로움이 곳곳에 드러난다. 김춘추와 함께 삼국통일의 최대 공신인 김유신의 조부며 금관가야의 왕자 출신인 무력의 이름이 귀족 가운데 세 번째로 보인다.

■ 따뜻하고 아름다운 신선의 땅

단양 영춘면 지역은 고구려 때 을아단현(乙阿旦縣), 통일신라 때 자춘현(子春縣)을 거쳐 조선 세종 때 영춘(永春)이라는 지명을 얻으니, 단양은 일찍부터 봄과 햇볕을 연상시키는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말마따나 단양은 산천경개가 아름다운 곳이라 내로라하는 시인 묵객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그림을 그렸다. 사인암은 고려말 유학자 역동 우탁(사인은 우탁의 벼슬), 도담 삼봉은 조선 건국 공신 정도전(도담은 정도전의 호), 그리고 바위에 새긴 탁오대(濯吾臺)와 복도별업(復道別業) 글자는 퇴계 이황 선생의 자취다. 단원 김홍도는 도담삼봉과 사인암, 옥순봉 등 단양 8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러나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단양은 3국 군대의 치열한 전투가 끊일 새가 없었던 군사 요충지였다.

단양 부근에서 남한강은 강폭도 넓고 수심도 깊어지거니와, 강 양안은 40~50의 깎아지른 절벽이 된다. 최근 단양군이 만든 잔도길을 걷노라면, 삼국시대 병사들이 얼마나 험한 길을 개척하면서 전투를 치렀는지 실감케 된다.
단양 부근에서 남한강은 강폭도 넓고 수심도 깊어지거니와, 강 양안은 40~50의 깎아지른 절벽이 된다. 최근 단양군이 만든 잔도길을 걷노라면, 삼국시대 병사들이 얼마나 험한 길을 개척하면서 전투를 치렀는지 실감케 된다.

■ 삼국시대 필쟁의 군사 요충지

충청도 동북 끝, 남으로 죽령 넘어 경북 영주, 서쪽으로 천등산고개 넘으면 충주로 통하는 4통 5달의 요충지 단양.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강원도 영월로, 남한강을 따라 내려가면 경기도 여주, 이천, 광주를 거쳐 한양으로 이르는 삼한의 필쟁처 단양. 강원 산간에서 땔감과 마초를 걷어 뗏목에 실어 남한강에 띄워 보내면 단양에서 건져 사용하고, 뗏목은 풀어 한강 하류를 공격할 군선을 지을 수 있었다. 단양을 가지면, 한반도의 심장부 경기를 장악할 수 있었다.

오늘날이야 차 몰고 액셀레이터 잠깐 밟으면 도경계쯤 10~20분이면 돌파하지만, 옛날엔 평화 시에도 고개 넘는 게 하루일이었고 고개 하나 얻으려 수만 병사의 목숨을 걸고 몇 년, 몇 십 년 전쟁을 벌였다. 백제땅 단양은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하면서 고구려로. 다시 신라 땅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고, 고구려 장수 온달이 아단성(온달산성) 아래서 전사한 슬픈 역사도 전해진다. 신라 진흥왕은 적성(단양)을 공략하여 탈취하고, 신라를 도운 공로로 적성 사람 야이차를 포상했다는 내용을 기록한 신라 적성비를 세웠다.

학창 시절, 진흥왕의 창녕 순수비와 북한산 순수비 사이에 뭐가 빠진 듯한 느낌이 많았다. 창녕이야 경주 바로 근처니 그렇다 치고, 경주와 북한산의 거리를 생각하면, 긴 순행 길에 백제군이 기습하면 진흥왕 일행은 큰 위기에 빠지게 된다. 중간 지점의 경호는 어떻게 연결했을까? 이 의문을 해결한 것이 1978년 1월 단양 신라 적성비의 발견이고, 단양 성재산 적성산성의 발견이다.

적성산성은 남한강 본류와 단양천, 죽령천 등 남한강 지류가 만나는 지점, 주변을 굽어보는 우뚝한 산 정상 천혜의 요새에 자리 잡았다.
적성산성은 남한강 본류와 단양천, 죽령천 등 남한강 지류가 만나는 지점, 주변을 굽어보는 우뚝한 산 정상 천혜의 요새에 자리 잡았다.

■ 약소국 신라의 도광양회 전략

단양 부근에서 남한강은 강폭은 넓고 수심은 깊어지고, 강안 양쪽은 50m 높은 절벽이라 천험의 요새가 된다. 강안 따라 만들어진 잔도길을 걷노라면 먼 옛날 중국 한나라 창업자 유방이 걸었다던 파촉의 험난한 잔도가 연상될 정도로 아찔하다. 그 험준한 천혜의 요새, 남한강 본류와 죽령천, 단양천이 만나는 호로병처럼 튀어나온 삼각지대의 꼭지점 높은 곳, 단양 일대를 조망하는 감제 고지(瞰制高地)에 둘레 923m의 산성으로서는 꽤 큰 적성산성이 있다. 성벽은 자연석을 대충 다듬어 폭 8자 정도로 단단히 쌓고, 흙을 다져 틈을 채웠다. 7, 8자의 성벽 높이는 별거 아닌 듯하지만, 급경사 지형을 잘 이용해 공성자에게는 무척 난공불락으로 느껴졌을 법하다.

신라의 진흥왕은 후진 소국의 왕이었지만 매우 전략적인 인물이었다. 먼저, 백제와의 동맹을 확인해 배후의 위험을 제거하고서 남쪽 금관가야를 병합해, 인구, 군사, 경제 역량을 배가했다. 금관가야는 비옥한 낙동강 하류 지역을 차지하고 일찍 철기문화를 발전시켜 일본에 식민지를 개척한, 작지만 강한 나라였다. 적성산성 적성비에도 금관가야의 왕족이며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의 조부 무력의 이름이 등장한다. 다음 동맹군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고서, 마지막으로 백제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한강 유역을 독점했다. 오랫동안 소백산맥 남동에 웅크리고 있다가 단숨에 고구려, 백제의 약한 고리를 치고 나가 한반도의 중심을 차지한 것이다. 신라의 전략은 약소국이 어떤 전략을 구사해야, 위기에서 살아남고 마침내 역사의 주역으로 설 수 있는지 좋은 귀감이 된다.

단양 신라 적성비는 진흥왕이 단양을 차지한 뒤 전공을 세운 지역민을 상찬하고, 신라 법령을 지역민에게 알리며 지역 관행을 신라의 법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아 세운 척경비(拓境碑)다. 단양 적성비와 진흥왕 순수비는 국가의 지도자에게도 좋은 가르침을 준다. 지도조차 없는 당시 국왕이 새 영토의 지리를 익히고 새로운 백성을 위무한 것은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현장 리더십이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명장 롬멜 원수 역시 전선을 직접 둘러보고서야 전략을 구상했다더니, 진흥왕 역시 그러했다. 복속한 지 얼마 안 돼 치안이 불완전한 땅을 순행한 것은 선봉 리더십이다. 교통과 통신이 불편한 고대 사회, 반란을 두려워 않고 몇 달씩 수도를 비우면서 순행을 떠난 것은 위임과 책임의 리더십이다. 권력의 위임은 국정 장악에 대한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늘날 우리 지도자들이 배워야 할 덕목들이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