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제국주의의 심장 도쿄서 ‘조선독립’을 외치다
“...한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이다. 일본 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조선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1919년 11월27일 몽양 여운형은 도쿄 제국호텔에 모인 일본의 수뇌부와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열변을 토했다.
3·1만세운동에 충격을 받은 일본 정부가 파리강화회의에 제출된 독립청원서를 보낸 신한청년당 대표 여운형을 회유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일본 정부가 여운형을 일본에 초청했을 때 많은 동지들이 말렸으나 몽양의 생각은 달랐다. “범의 굴에 가야 범을 잡을 게 아닌가. 설사 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대도 조선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천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네.” 적의 심장부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당당하게 밝힌 몽양의 연설은 일본 정가를 혼란에 빠트렸다. 결국 이 일을 기획한 내각이 책임을 지고 총사퇴한다.
■ 3·1운동의 기원을 찾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이라는 헌법 전문에서 보듯 3·1운동은 대한민국을 탄생시켰다. 그렇다면 3·1운동은 과연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양평군 양서면에 자리 잡은 몽양기념관(관장 김덕현)은 양평군이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몽양 여운형(1886~1947)의 생가 터에 선생의 삶과 정신을 알리고자 2011년 11월27일 개관한 군립기념관이다. 경의중앙선을 타고 양수역을 지나면 신원역이다. 역 광장에 몽양 여운형의 친필 ‘혈농어수(血濃於水: 피는 물보다 진하다)’가 새겨져 있다. 몽양기념관으로 향하는 ‘양평 물소리길’가에 ‘묘골애오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묘골은 몽양이 태어난 마을 이름이고 애오와는 ‘사랑하는 나의 집’이란 뜻이다. 몽양의 국제적 교류를 조각과 지도로 보여주는 공원을 지나 몽양의 말을 바위에 새긴 ‘어록길’이 끝나는 지점에 기념관이 있다.
“몽양기념관은 몽양 여운형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터에 세운 것입니다. 선생의 호 ‘몽양’은 어머니가 임신하면서 태양을 보았다는 태몽을 꾸었다고 해서 지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몽양 선생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개혁가, 혁명가의 기상을 타고 났다고 기대를 모았지요. 몽양은 신분제 타파의 계몽개혁가이자 신학문 신문명의 선도자였어요. 그리고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 세계를 다니며 독립운동을 조직하고 세계적 지도자와 교류한 외교가이자 혁명가, 정치가였습니다.” 김덕현 관장의 소개처럼 몽양은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매력적인 인물이다. 상설전시관은 몽양이 일생동안 얼마나 정력적으로 활동했는지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강지현 학예팀장의 안내로 전시관을 들어선다. 자연광이 들어오는 환한 공간이다. ‘거침없는 웅변가’와 ‘한국 체육의 초석을 놓은 스포츠맨’을 비롯해 ‘자주 통일국가를 설계한 민족주의자’까지 13개의 천에 몽양의 활동을 알리는 글과 사진을 새겨져 있어 몽양의 풍모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적의 심장부 도쿄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외친 몽양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은 어땠을까? 1886년 양평군 신원면 묘골에서 태어난 여운형이 16세까지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며 동학을 수학한다. 묘골 고향집을 배경으로 서 있는 흑백사진 속 몽양의 얼굴이 편안하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인내천 사상은 청년 여운형이 실천한 노비해방과 평등사상의 기초가 된다. 수운 최제우의 말씀을 한글로 기록한 ‘용담유사’는 몽양 사상의 배경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이처럼 상설전시관에는 몽양 여운형의 생애와 활동을 알려주는 유물과 자료들이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총탄이 꿰뚫은 피 묻은 양복과 셔츠가 관람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1947년 7월19일 권총테러로 피격될 당시에 입고 있었던 상의 3점(혈의)은 국가등록문화재 제608호로 등록된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인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장에서 사용되었던 만장 5점도 전시되어 있는데, 몽양이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에게 존경 받았는지를 알려주는 유물이다. 만장은 장례가 끝나면 불에 태워버리는 것이 상례였지만, 몽양의 유족들은 이런 물건들까지 고이 간직했다. 아우 여운홍을 비롯한 가족들의 지극한 정성이 몽양의 정신을 더욱 빛나게 한다.
■ 신한청년당과 몽양
1918년 8월, 상하이에서 여운형이 장덕수, 김철, 선우혁, 조용은, 한진교 등의 동지들과 조직한 신한청년당이 만세운동으로 연결되는 근거는 무엇일까? 미국이 특사 크레인이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파리평화회담에 대하여 미국의 입장을 밝히는 자리를 참석한 여운형과 그의 동지들은 “전후의 식민지 처리는 피압박민족의 의사와 민족자결의 원칙을 존중하여 처리한다”는 미국의 입장을 듣고 이 기회를 활용하기로 결의한다.
11월28일 신한청년당 대표 여운형의 이름으로 ‘한국독립에 관한 진정서’ 2통을 작성하여 미국 대통령 윌슨과 파리평화회의 의장에게 전달해 줄 것을 크레인에게 의뢰한 문서를 살펴보며 그날의 열정을 확인한다. 1월 베이징에 있던 김규식을 상하이로 불러 신한청년단 대표 겸 한국민족대표로 파리평화회의에 파견하였다.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했던 김규식과 여운형의 아우 여운홍의 모습을 당시에 촬영한 한 장의 사진을 통해 확인한다. 국내로 선우혁(평양), 김철(경성), 김순애(부산, 대구)가 파견되고, 장덕수와 조용은(조소앙)은 일본으로, 여운형은 만주와 러시아로 출발한 사실을 그림으로 전달하여 이해를 돕는다.
3·1운동에 앞서 재일본조선유학생학우회가 중심이 되어 일본 도쿄에서 발표된 ‘2·8독립선언문’을 살펴본다. 신한청년당의 활약상을 잘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신한청년당의 동지들이 각지로 흩어져 동포들에게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보여주는 집단행동을 역설하고 조직한 것이다. 이처럼 기미년 만세운동이 벌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 신한청년당이 존재했던 것이다. 물론 그 중심에 여운형이 있다. 광복 직후에 이루어진 첫 여론조사에서 여운형은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와 ‘생존 인물 중 최고의 혁명가’에서 최고의 득표를 얻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에야 몽양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마침내 국가가 몽양의 진면목을 보증한 것이다.
■ 대한민국의 미래를 묻다
상설전시관은 몽양의 삶을 시대와 주제에 따라 전시하고 있어 시간을 두고 둘러보면 몽양의 위대한 생애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몽양기념관 마당에 광동학교 터라 새겨진 비석이 있다. 청년 여운형은 1907년 클라크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고향에 예배당을 겸한 광동학교를 세워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장로는 당시 광동학교에서 여운형에게 애국사상을 배운 학생 중 한 명이다. 전시관 위쪽에는 몽양의 생가를 정성스럽게 복원해 놓았다. 방 안에서 면도하는 몽양의 밀랍인형에서 좌우합작,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진력하던 시절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생가는 시대와 공간을 넘어선 몽양 여운형 선생의 포용적이고 낙천적이며 열정적이었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공간이다.
몽양기념관에서는 매년 5월25일 몽양탄신일을 기념한 특별기획전시와 11월27일 개관일을 기념한 몽양학술심포지엄, 기획전시를 개최하고 있다. “곧 문을 열게 될 ‘몽양교육자료관’은 작은도서관과 교육실, 강당을 문화복합공간으로 지역민들의 문화 사랑방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기념관 관계자는 지난 2월에 문을 연 디지털플랫폼 ‘몽양여운형아카이브’는 최초의 독립운동 인물 아카이브란 사실과 국가등록문화재 제608호인 ‘혈의’에 이어 장례용품 만장 117점을 국가등록문화재 등록 신청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곧 개관할 몽양기념관에서 몽양역사예술교실과 명사초청강연, 융합문화예술프로그램, 뮤지컬 공연과 영화 상연 등 다양한 사업이 펼쳐질 것이다. 갈등과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대한민국의 산적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몽양이 씩씩하게 걸어갔던 길에 그 해답이 들어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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