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달산 중턱 길은 느낌 좋은 산책로다. 나에겐 뒷동산 같은 곳이지만 벚꽃 핀 봄날 아쉽지 않으려고 의례처럼 오른 것 외엔 올 기회가 없었다. 카페에서 먼 허공을 본다. 찬 바람이 회초리처럼 날카롭게 파열한다. 겨울은 더욱 거칠고 툰드라의 늑대처럼 고독하게 닥칠 것이다. 바니타스적인 싸늘하고 포악하고 험난하게. 계절풍처럼 인생의 시간은 떠나고 회귀하며 간혹 크레바스 같은 역경의 틈을 이룬다.
겸허한 오늘이 좋다. 내일을 안다면 사람은 무얼 할까. 망각이 그러하듯 미래의 운명을 예견하지 못하는 것은 신이 주신 또 하나의 축복 같다. 맑은 통유리를 뚫고 빛이 깊이 들었다. 커피 한 잔을 마신다. 따뜻한 빛과 따뜻한 커피와 따뜻한 카페의 전형이 좋다.
아래의 풍경은 천지개벽이다. 멀리 노을 빛 전망대가 있는 교회는 그대로인데 봄에 보지 못했던 아파트와 빌딩들이 비 온 후의 죽순처럼 왕성하게 군집해 있다. 그새 복잡하고 낯설게 변했다. 과밀이 죄는 것은 모두가 섬이 된다. 인간이 인간에게 스스로 갇혀 고립돼 간다. 나의 화실이 있는 옥탑방도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진눈깨비가 퍼붓는 환영 속에 남은 달력 한 장이 마지막 잎새처럼 매달렸다. 고결한 겨울연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가 눈처럼 흩어 내린다. 피셔디스카우의 굵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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