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균의 어반스케치] 교동 다정마트-추억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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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비로소 스며든다. 여름 불볕은 속수무책 쌓인 분노 같았다. 규정하기 어려운 계절은 기습적이다. 분잡한 책장을 바라보다가 눈에 띄는 시집 하나를 펼쳤다. 무르익은 감잎 향이 책갈피를 타고 흐른다. 행간은 짧고 온통 상처투성이였던 지난 열정들이 마음 한쪽을 흔든다. 불면의 시간은 차라리 반납해야 했다. 나는 문득 이런 시를 끓어오르는 애심처럼 읽었다.

 

“마음은 바람보다 쉽게 흐른다./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지다가/어느새 나는 네 심장으로 들어가/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 -최승자 ‘너에게’

 

비장한 결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가을은 잊힌 추억을 불러오지만 흩날리는 낙엽처럼 작별한다. 흩어진 스케치를 모으다가 향교 앞 다정마트를 발견했다. 가게 안의 방에서 까만 비닐봉지에 물건을 담아준 후 백 원짜리 동전을 거슬러 주던 주인 아저씨가 떠오른다. 미닫이창 사이 어두운 방엔 액자에 담긴 가족사진이 비스듬히 아래를 내려보고 있었다.

 

언젠가 지원 사업이 있었던지 정감 있는 낡은 간판이 새것으로 바뀌더니 이젠 아예 사라졌다. 이웃집 춘천막국수도 뜯겨나가고 정 때 묻은 흔적들은 모두 공터가 됐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추억을 새끼 캥거루처럼 가슴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추억은 사라지지 않는 꿈 같다. 그럴까. 먼 훗날 나 없는 세상에서 내가 놓아준 나의 분신 같은 작품들도 누군가의 추억 속에서 숨 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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