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질어도 빛은 영글었다. 길가에 핀 나팔꽃, 맨드라미, 봉숭아꽃도 아직 초등학교 화단처럼 남아 있다. 마음의 행로는 넓어 우주의 끝, 하나님의 은혜, 아바타의 심장까지 간다. 바람과 햇살에도 탑승할 수 있고 너의 곁에 나의 꿈을 심을 수 있다. 노란 잎이 가을 편지를 날린다. 가을이야말로 시적 산문이다.
오늘 수업은 자신이 좋아하는 소재를 그려 보는 시간이다. 일상이 담긴 마을 풍경을 원했다. 파리바게뜨와 멋진 스파게티집이 있는 상가를 그리는 분, 우리가 함께 갔던 생선구이집이 있는 골목, 알록달록한 축대와 돌계단이 있는 집 등 다양한 그림이 나왔다. 그림을 들고 각자 재밌게 설명한다. 자신의 그림이 왜 그려졌는지에 대한 답에 전제를 둔 것이다.
그중 가장 깊은 이야기를 새긴 그림을 발견했다. 부족하지만 순수한 내면에 많은 색과 정을 담은 그림이다.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담아낸 송춘삼님은 자신의 옛집을 설명하면서 슬픔을 삼켰다.
지금은 사라진 남수동 작은 집에 부모 형제가 함께 살았던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운 것이다. 동네 구멍가게를 겸했다는 엄마의 집은 그래서 더욱 못 잊을 추억이다. 69세 고령에도 엄마는 늘 엄마인 것. 10여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요즘은 은퇴해 전국을 다니며 멋진 풍경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하신다.
이맘때 엄마는 초가지붕 위에 걸린 박을 갈라 박국을 끓이셨다. 가을 뭇국과 함께 가장 시원하고 담백한 맛이었다. 엄마의 손이 무척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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