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수강생들과 보통리로 스케치를 떠났다. 먼 여행이 아닌 교외이지만 도시를 벗어난다는 것은 휴식과도 같다.
물 위에 뜬 연잎은 아직 푸르고 그 위로 가끔 오리들이 튀어올라 무겁게 날고 있다. 저수지 둘레길을 돌며 스케치 소재를 살핀다. 멋진 주택들이 전망 좋은 언덕에서 수면을 내려다보고 있다. 소설 속 같은 빨간 집, 텃밭을 단정히 가꾼 모습이 풍성해 보인다. 굵직한 무와 억센 열무, 엄청나게 큰 작두콩, 속이 꽉 찬 배추도 싱싱하다.
모든 잎이 조금씩 색을 잃고 있다.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자연도 인간도 광합성 에너지를 비축해야 할 시점이다. 길가의 고들빼기, 들깻잎이 그윽한 가을 내음을 선사한다. 이즈음은 고들빼기김치와 깻잎, 김치를 담글 때다. 골목엔 양념 냄새가 가득했다. 아랫목엔 삭힌 감과 우물가엔 삭힌 깻잎이 옹기에 담겨 있었다. 우리는 전망 좋은 카페에서 저수지와 건너편 전원주택들을 바라보며 각자 맘에 드는 풍경을 스케치했다. 밖을 나오니 마음들도 한결 새롭고 그림도 즐겁고 재미있어 보인다.
시월의 마지막은 늘 우수적이다. 문득 이런 가을의 시 한 편이 스친다. “모든 나무의 선 그 흔들림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이 시월/무사 무사의 이 침묵/아침 거품 물고 도망하는 옆집 개소리/하늘을 들여다보면/무슨 부호처럼/떠나는 새들/자 떠나자 무서운 복수로 떼지어 말없이/모든 기억이 캄캄한 곳으로.”-황동규 ‘철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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