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외교 최전선서 구국투사 규합하고 中 지원 이끌어내
광복 70주년을 맞아 경기도박물관에서 의미있는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남파 박찬익(1884~1949)과 임시정부 재무부차장이었던 신건식(1889~1955)·부인 오건해 (1894~1955)를 회고하는 특별전이다.
이들의 자녀이자 광복군 부부인 박영준(1915∼2000)·신순호(1922~2009) 부부가 기증한 자료를 토대로 개최된 특별전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만이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으며 평생을 살아왔는지는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이 특별전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얼마나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을 외면하고 살아왔는지 부끄럽게만 할 뿐이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자 광복군을 조직했던 박찬익 선생은 사실 우리에게 낮설은 인물이다.
하긴 독립운동사를 전공하지 않은 일반 시민들에게 백범 김구 선생이나 안중근, 윤봉길 의사 등을 제외하고나면 익히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우리들이 우리의 역사를 되찾게 해준 수많은 은인들을 기억하는 교육을 하지 않은데 있다.
유럽의 수많은 국가들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레지스탕스’를 기억하는 교육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으니 우리가 얼마나 친일의 흔적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박찬익 선생을 일찍부터 기억하지 못하고 현양하지 못한 것은 그분의 남에게 공을 돌리는 겸양과, 직책이나 명성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천품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박찬익 선생이 태어난 곳은 임진강과 한강을 좌우로 두며 천혜의 평야를 품고 있는 서기가 내린 땅 파주(坡州)였다. 두 강이 교차한다고 하여 교하(交河)라는 지명이 붙기도 했던 이곳은 광해 임금이 수도 한양을 떠나 천도(遷都)하고자 했던 곳이다.
파주는 율곡 이이의 본거지이기도 하듯 실제 조선시대 학문 사상의 태동지이기도 했다. 이처럼 유서 깊은 파주의 주내면에서 박찬익은 1884년 1월2일 태어났다. 주내면은 대추가 많아 일명 대추골이라고 불렸는데 그 중에서도 아름드리 대추나무가 있는 정승댁이 그의 집이었다.
조선시대 가장 많은 문과급제자를 배출한 반남박씨 명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어려움 없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열강들이 조선을 침탈하는 모습에 분개해서 새로운 학문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박지원의 손자로 개화파의 핵심이었던 박규수가 그의 일가였으니 그가 새로운 학문에 대한 열정을 갖게된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가 민영환 선생이 기울어가는 조선을 바로 세우고자 만든 관립상공학교(官立商工學校)에 입학한 것은 유교 교육관이 투철하던 시기에 그의 선택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우국지사 민영환의 깊은 배려로 학교를 다니며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대한제국의 슬픈 현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결국 관립상공학교에 재학 중 국권회복을 위한 모의를 여러 차례 하다가 발각돼 1904년에 퇴학당하고 말았다.
더불어 한일늑약으로 자신이 존경하는 민영환 선생의 자결 이후 새로운 조국의 자주화 운동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상공학교 동기인 박호원의 주선으로 신민회에 가입했다.
신민회가 궁극적 목적으로 설정한 것은 국권을 회복해 자주 독립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지금 당장 힘이 없어 국권을 박탈당했으므로 우선 무엇보다도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실력의 양성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또한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며 국가의 부강은 국가를 이루고 있는 국민의 부강에서 나온다는 상당히 진보적인 사상에 기초하고 있었다.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국가의 주인인 ‘백성이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박찬익이 한 첫 번째 일은 자신의 집에 소속된 노비를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평등을 지향하는 신민회의 입장에서 보자면 백성들을 새롭게 만들어 새로운 조국을 만들자고 운동하는 이들이 봉건잔재의 산물인 노비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용납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박찬익 역시 신민회의 강령에 동의했고 자신들의 가족을 설득하여 노비를 해방시켰으니 이는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찬익은 신민회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서북지역을 다니면서 일본의 수탈로 점점 피폐해 가는 나라의 살림과 백성의 삶을 피부로 절감하면서 학교 설립운동과 야학운동에 주력했다.
서울로 돌아온 박찬익은 1907년 한일 신협약에 의해 나라는 기울어가고 나아가 조선인 군대마저 해산당하는 치욕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일본인의 경제침탈이 노골화된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조선의 산업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로지 일본에서 수입된 제품들이 조선땅에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자주경제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박찬익은 기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지금 같은 가내 수공업이 아닌 대량의 일본 제품에 대항 하려면 근대적인 기술과 공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박찬익은 관립공업전습소(官立工業傳習所)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러한 박찬익과 혁신적 생각에도 조국이 일제의 손아귀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래서 학교 동급생이자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약속한 박승익 등 10여명과 함께 1910년 겨울 만주 용정으로 망명했다.
당시 용정은 조선 독립운동의 메카였다. 이상설이 서전서숙을 만들고 김약연이 명동학교를 만들어 젊은 청년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용정에서 멀지 않은 삼원포에 우당 이회영 형제들이 신흥무관학교를 만들기도 했다.
박찬익은 북간도에서 이상설·백순 등의 지도로 독립투쟁을 계획하는 한편, 대종교의 지도자 나철(羅喆)의 권유로 대종교에 입교했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에 입도를 했는데 이는 신앙관을 떠나 민족종교로서의 가치와 독립운동의 기치를 대종교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던 박찬익은 1912년 중국 관헌의 지원을 얻어 화룡현 삼도구 청파동에 한국인 학교를 설치하고 애국사상과 자립사상을 고취했다.
동시에 대종교의 정교직을 맡아보면서 포교에도 힘썼다. 그러나 이 생활도 오래 갈 수 없었다. 그는 1915년 중국인 교육위원회 위원에 선임됐으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 북간도를 떠나 길림으로 피신했다가 상해로 갔다.
상해에서 자신의 오랜 후원자이자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던 신규식 선생을 만나 동제사(同濟社)를 창설하고 노령의 동지와 긴밀하게 연락했다.
당시 신규식은 국제 정세, 특히 중국의 정세를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공화주의 혁명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래서 ‘동주공제(同舟共濟)’ 즉 한마음 한뜻으로 같은 배를 타고 독립국가를 건설하자는 운동단체를 조직했다. 그리고 박찬익과 함께 동제사를 중심으로 교육운동과 군사 훈련을 활성화시켰다.
박찬익이 조선 독립운동의 중심 인물로 성장한 것은 1918년의 대한독립선언서 발표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18년 12월 조소앙·김좌진 등 39인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있었던 독립선언서 발표는 1919년 3·1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3·1만세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자 이동녕·이시영·조소앙 등 30여명과 함께 참여했다.
그리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면서 임시정부 육성에 진력했다. 또한 서울에서 1919년 4월에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에 박은식·신채호 등과 같이 평정관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19년 8월 정의단이 서일(徐一) 중심으로 대한군정서로 개편됐을 때 외교처장직을 겸임해 이 단체를 임시정부 산하로 편입시켰다.
1921년 7월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 겸 외무차장 대리로 외교업무를 전담, 대중외교에 전념했다. 당시 외무총장 신규식이 국무총리를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외교업무를 대행했던 것이다. 또한 그 해 11월 신규식이 중국 호법정부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외교공세를 펼 때 사위인 그가 부사로 활동해 중국 호법정부 총통 손문(孫文)으로부터 임시정부 승인을 받아냈다.
박찬익은 성정(性情)이 강직하고 남다른 포용력을 가지고 있어 상대방의 신임을 얻는 천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탁월한 중국어 실력으로 만주의 군벌들이나 국민당의 지도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임시정부의 경제적 지원이나 만주 지역에서의 무장투쟁에 있어서 만주 군벌들의 양해를 받을 수 있었다.
이는 박찬익이 신규식 선생을 따라 일찍이 중국 국민 혁명의 원로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따라서 중국 국민당 요인들도 박찬익을 북벌의 선배로 혹은 동지도 대접했다. 뿐만 아니라 박찬익은 중국인을 움직일 줄 알았다.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의 실무자들이 광복군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군사 실무적으로 처리함에 따라 통수권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이때마다 박찬익은 국민당 요인들과 여러 가지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어나갔으며 광복군 지원문제가 벽에 부딪혔을 때 백범 김구 선생을 모시고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자는 주장을 폄으로써 당황한 중국 요인들이 광복군에 대한 전적인 지원을 약속하게 한 것도 역시 박찬익이었다. 결국 박찬익이 아니었다면 임시정부의 활동은 미미한 수준으로 그쳤을 것이며 광복군 창설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조국이 해방됐을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상해 임시정부의 요인들 대부분이 조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상황에서 자신도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남아 뒤처리를 담당하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단장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약관의 나이에 조국을 떠나 38년만에 돌아온 그는 모진 고생 끝에 얻은 병마로 돌아온지 7개월 만인 1949년 3월9일 세상을 떠나게 된다. 아마도 그가 있었다면 탁월한 협상력으로 좌우의 대립과 분단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혼탁하고 분열된 시대에 제2의 박찬익이 나와 분단의 벽을 허물어주기를 기대한다.
김산(홍재연구소장) / 사진=경기도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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