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즉위 600돌_대왕의 꿈이 깨어난다] 3. 세종대왕이 여주에 잠들기까지
[세종 즉위 600돌_대왕의 꿈이 깨어난다] 3. 세종대왕이 여주에 잠들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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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영릉, 조선의 명운 100년 연장시킨 ‘천하의 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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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은 지난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총 40기가 18개 지역에 흩어져 있다. 그중 세종대왕이 묻힌 여주 영릉(英陵)은 조선 왕릉 중에서도 대표적이다. 

영릉은 한국 역사에서 세종이 첫손에 꼽히는 임금인 만큼, 조선 왕의 무덤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왕릉이다. 세종대왕릉이 여주로 천장(遷葬,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김)된지 549년. 세종이 여주에 잠들기까지 그 과정이 평탄하진 않았다. 조선 역사에서 왕릉이 천장하는 사례가 종종 있는데 영릉도 그렇다.

■ 세종은 왜 여주에 잠들었나
세종대왕은 소헌왕후 사이에서 낳은 여덟 번째 아들인 영응대군 집에서 승하했다. 이후 미리 정해 놓은 장지에 묻혔다. 세종 28년 먼저 세상을 뜬 소헌왕후가 있는 곳이다.
본래 영릉(英陵)은 서울 대모산 자락에 있었다. 세월이 많이 지나 현재 구 영릉이 있던 자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못하고 있다. 1970년대 발굴 당시 영릉과 관련한 석물들을 발견했지만 묻혀있던 자리를 찾지 못했다.

구 영릉은 세종의 부왕과 모후의 무덤인 헌릉(獻陵) 인근에 조성했다. 1445년 세종 27년에 헌릉 서편에 묘자리를 확정했다. 당시 우의정 하연, 예조판서 김종서, 우참찬 정인지 등 관리가 명나라의 풍수지리서를 참고해 산릉(국장을 하기 전에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않은 새 능) 자리를 정했다.

조선시대 왕릉을 정하는 데 풍수지리가 중요한 기준이었다. 소헌왕후가 훙하고 묘자리에 대해 풍수지리가 불길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세종은 “선영 곁에 장사하는 것만 하겠는가”라고 강행했다.

영릉의 풍수에 대해 문종대부터 논의가 있었다. 세조대에도 영릉 개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세종대 중국 문물 수입 과정에서 풍수 서적이 많이 들어왔고 이후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다. 세조는 풍수지리를 가장 깊게 연구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영릉(英陵)을 개장(改葬)할 것을 의논하게 하고, 신숙주(申叔舟) 등에게 명하여 경기(京畿)에 가서 땅을 가려 정하게 하였었는데…(중략) 산형도(山形圖)를 보고 이내 안효례·최호원 등을 불러 길흉(吉凶)을 변론하게 하였더니…(중략) 모두 우물우물하고 길흉(吉凶)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므로, 명하여 의금부(義禁府)의 옥(獄)에 가두게 하고 아울러서 파직(罷職)시켰다.(세조실록 42권, 세조 13년 4월 5일)

이 기록에는 영릉 천장을 의논했으며 그 자리를 서울과 가까운 경기에 두려고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장지를 정하는 데 풍수를 중요시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어 예종대 신숙주, 한명회, 서거정 등이 영릉을 옮기기 위해 지리서를 참고해 자리를 논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명회가 옛 임강현 터(경기 북서부)에 능침을 쓸 만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오랜 논의 끝인 예종 즉위년 12월 26일, 천장지는 여흥(현재 여주)으로 결정됐다.
여주의 풍수지리에 대해서는 조선 제24대 왕인 헌종대 논한 기록이 남아 있다.

산릉 도감(山陵都監) 당상인 조형과 민유중이 여러 산을 살펴보고 들어오니, 상이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는데, 우의정 김수흥도 입시하였다. 상이 차례로 여러 산의 우열을 하문하니, 김수흥 등이 여러 지관(地官)의 말로 대답하기를, “화접동(花蝶洞)의 형세가 꽤 좋지만 혈(穴)위에 10여 개의 옛무덤이 있으니 쓸 수 없을 듯하고, 영릉(寧陵)의 백호(白虎) 밖 첫 번째 언덕이 영릉에 비교해 낫지만 마무리되는 마당이 작으니, 모두 영릉(英陵) 안쪽 홍제동(弘濟洞)의 순수하게 좋은 곳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현종개수실록 27권, 현종 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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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릉 재실

■ 천하명당에 자리잡은 영릉
영릉은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조선 왕릉의 공간구성에는 특징이 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공간인 정자각을 중심으로 세 부분이다. 재실 등이 자리하는 진입공간,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과 제례로, 수복방, 수라간이 배치된 제향공간, 언덕 위 봉분을 중심으로 곡장과 석물이 조성된 죽은 자의 공간 등이다.

영릉도 조선 왕릉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주 경관과 영릉은 감탄이 나올 만큼 잘 어우러져 있다.

북성산이 주맥이다. 능 뒤에 솟은 칭성산은 병풍을 두른 형상 같다. 또 작은 산맥들이 왕릉을 향해 엎드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란반개형의 명당으로 모란꽃이 반쯤 피어난 형상을 하고 있다. 이곳으로 천장해 조선왕조가 100년 더 연장됐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명당 자리로 꼽힌다.

천장과 관련해 여주에 내려오는 전설도 흥미롭다. 세종대왕이 여주에 온 필연성과 까닭을 담고 있는 이야기다. 우의정 이인손이 죽자 후손들이 좋은 자리를 고르기 위해 지관을 찾았다. 지관은 자리를 잡아주며 “어떤 일이 있어도 봉분과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자손들은 이를 잊었다. 조정에서 영릉 천장론이 대두돼 각지에서 지관을 풀었고, 한 지관이 여주 능서면을 찾았다. 갑자기 온 소나기가 멎자마자 자신이 찾던 명당을 발견했다. 앞에는 북성산이 신하가 엎드린 모습으로 있고, 작은 산들이 겹겹이 둘러있었다. 회룡고조형의 대명당이었다.

이인손의 후손은 봉분을 세운 것을 후회하며 묘를 옮기려고 땅을 파헤쳤다. 그러자 ‘이 자리에서 연을 날려 연이 떨어진 자리에 이장하라’고 적힌 비기(秘記)가 나왔다. 후손은 비기대로 했고 이인손의 묘는 능서면 신지1리에 있다.

이런 전설이 아니더라도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뿐만 아니라 효종대왕과 인선왕후, 세종의 누이인 경안공주까지 여주에 묻혀 있다. 여주가 역사적으로 좋은 기운을 가지고 있는 땅으로 인정받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류진동·손의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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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원보감에 그려진 영릉과 영릉산릉도.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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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정해득 한신대학교 교수
“왕·왕비 함께 묻힌 최초의 합장릉 큰 의미”
정해득 한신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는 조선 왕릉능역 전체를 조선 왕릉으로 봐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 왕릉제도 전반을 연구하며 제도의 발전 과정을 규명했다. 정해득 교수에게 영릉(英陵) 이야기를 들어봤다.

-세종대왕릉의 의미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조선 왕릉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세 가지 의미가 있다. 한 왕조의 왕릉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제향이 복원돼 이뤄지고 있다. 또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고 경관이 우수하다. 왕정국가에서는 전란이나 후왕조에 의해 왕릉이 많이 파괴되기 때문에 조선 왕릉처럼 남아 있는 건 드물다. 보통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려면 시신이 묻힌 공간을 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어 그런 과정이 필요 없었다. 영릉도 천장 과정이나 당시 몇 사람이 동원됐는지 같은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영릉을 여주로 천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세조는 정통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다. 정통성을 보이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왕실 사업을 해야 했다. 자신이 풍수지리를 공부했으니 그 이야기를 거론했을 거다. 실록을 제외하고 조선 전기 서적이 없어져서 당시 여주의 풍수지리에 대해 논한 구체적인 기록을 찾기 힘들다.

-여주 영릉의 특이사항은.
여주 영릉은 서울에서 가장 멀리 있다. 조선 왕릉은 관례상 서울로부터 100리 안에 두는 걸로 돼 있다. 그 기준이면 수원, 파주, 화성, 여주 등 경기도 권이다. 남한 땅에서 현재 기준으로 영월 장릉이 가장 멀지만 나중에 봉릉한 것이다.

-영릉이 왜 중요한가.
최초 합장릉이다. 조선 왕릉 중에서도 영릉이 중요한 이유는 한 봉분 안에 왕과 왕비가 최초로 함께 묻혔다. 그 전까지는 봉분 하나에 왕, 다른 하나에 왕비가 있었다. 세종은 <주자가례>와 명나라 능묘제도를 심층적으로 연구해 조선 왕릉에 적용하고자 했다. 그래서 부부합장을 실현했다. 사람이 한시에 죽지 않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합장릉을 만드는 것이 어렵다.

이런 형태는 영릉과 함께 정조와 효의왕후가 합장된 건릉이 대표적이다. 이념 상 주자가례를 지향하지만 실질적으로 실천한 왕은 둘이 대표적이다.

손의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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