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꽃보다 무엇이 중요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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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무대에서 연주를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무대로 꽃다발을 들고 나와 협연자에게 전달하는 전문직원이 있다. 이런 전통은 남미 또는 클래식 신흥국가인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지나치게 융숭하며 때에 따라서는 과분한 대접’은 단순한 요식행위가 아닌 청중을 대표하여 연주자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의식’이라는 것을 나의 연주생활을 거치면서 깨닫게 되었다.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끝나면 환호하는 청중들이 연주자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꽃송이를 무대로 던진다.

 

반면, 서울에서 이런 전통은 없다. 그리고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 심지어는 열정의 소프라노가 “불처럼 뜨거운 내 입술의 키스” 라는 제목의 아리아에서 상대방을 유혹하는 장면을 위해 소품으로 장미 한 송이를 무대에 들고 나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해할 수 없는 규칙이지만 따라야 한다. 궁여지책으로 나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화라도 들고 나가게 했다. 조화를 들고 노래하는 소프라노와 이를 지휘하는 나의 가슴은 허전함을 숨길 수 없었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콘서트홀인 월트디즈니홀의 연주자 대기실은 연주자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작은 정원을 갖추고 있었다. 대기실에서 피아노를 치는 순간 느꼈던 그 아름다운 음향을 아직 잊을 수 없다. 한 쪽 창문으로는 탁 트인 하늘과 구름을 또 다른 창문은 LA의 스카이라인을 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내가 예술가로 태어난 것이 진실로 행복하였다. 중국 광쩌우의 콘서트홀은 깨끗이 정리해 놓은 침대와 여행 중 혹시라도 구겨진 연주복을 펴 줄 스팀다리미가 구비되어 있었다. 물론 중국답게 대기실 사이즈도 세계 최대였다. 상하이 심포니 홀은 에스프레소커피 머신이 있었다. 중국이나 일본은 이런 서양음악의 뿌리를 존중하고 그 전통을 나름대로 만들어가려는 의지를 볼 수 있었다.

 

뉴욕 카네기홀의 대기실은 백여 년의 역사를 거치며 이 대기실을 사용한 대가들의 사진이 그들의 서명과 함께 벽에 가득히 걸려 있었으며 이곳에 잠시 머무는 그 자체가 역사 앞에 나의 존재가 얼마나 왜소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숙연한 시간이었다. 이 모든 현상의 근본은 과연 누구를 위한 연주 홀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비롯된다. 우리 연주단체들은 반나절 사용하는 연주공간을 대여하기 위해 강남의 웬만한 사무실 한 달 치 임대료를 지급한다.

이런 적지 않은 대관료를 지급하며 이런 곳에서 연주를 하려하는 것은 품위와 전통이 역사 속에 살아있고 최고의 음향을 가진 공간에서 피 땀 흘려 연습한 연주력을 우리의 청중에게 전달하기 위한 예술가정신이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이다. 특히 한정된 민간단체의 열악한 예산으로 이런 연주를 하는 것은 대단히 모험적인 시도이다. 

우리나라 연주홀은 건축단계에서부터 문제가 크다. 우후죽순처럼 건설되는 방방곡곡의 연주 홀들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연주자들이 몇 시간씩 대기하는 공간에 창문이 있는 곳은 과연 몇 군데일까? 환기가 되지 않는 곳에 성악가의 대기실을 설계한 그런 손길이 과연 무대에서의 음향을 제대로 염두에 둘 수 있을까? 나는 한국의 많은 홀에서 연주를 해 보았지만 바깥 공기를 접하며 또는 하늘을 바라보며 연주 전의 긴장을 풀 수 있는 곳은 찾기 힘들다. 연주장의 음향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대기실을 우선으로 하는 그런 홀들을 이제부터라도 지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과연 한국에도 그런 홀이 있을까? 다행이도 나의 답은 ‘있다’이다. 앞으로 우수한 콘서트홀의 건설을 계획하는 단체가 있고 우리 실정에 맞는 모델을 찾으려면 경기도 기흥에 위치한 삼성인재개발원 콘서트홀의 견학을 권한다. 이 홀을 벤치마킹하면 된다.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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