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임양은 주필’

같은 사무실에서 모신 게 2011년부터다. 이미 건강은 많이 악화돼 있었다. 몸의 균형을 잡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만성적 청각 장애로 대화가 불편했다. 병원에서도 딱히 병명을 잡아내지 못했다. 한 번은 그 스스로 진단을 내렸다. “난 약물 중독이야.” 그가 지목한 약은 ‘명○’이다. 70년대 만병 통치약으로 통했던 가루약이다. 젊은 시절부터 이 약을 버릇처럼 복용했다고 했다. ‘소송을 하시라’는 말에 “다 늙었는데 뭘”하고 웃어넘겼다. ▶사무실 문이 열리면서 청소 아주머니가 소리쳤다. “주필님 넘어지셨어요.” 이어 비틀거리며 그가 들어섰다.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래층 편집부로 내려가던 중 쓰러진 거였다. 피묻은 원고를 건네며 말했다. “마감해야 돼. 이거 좀 갖다 줘.” 직원들이 달려와 옆 병원으로 업고 뛰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다. 치료를 받은 그가 창백한 얼굴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말없이 허리 굽혀 손을 잡았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괜히 나 때문에….” ▶그의 글은 강했다. 철저하게 보수주의를 지향했다. 남북문제에 관한 사고는 철저하게 반공(反共)주의였다. 6ㆍ25동란 중 겪은 공산주의 현실을 자주 얘기했다. 지금은 쓰지 않는 ‘인공(인민공화국) 치하’라는 단어도 고집했다. 항의 전화도 숱했다. 그때마다 웃어넘겼다. 한 번은 ‘괜찮으시냐’는 걱정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무더기로 몰려와도 좋아.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그게 내 꿈이다.” ▶2014년 3월 퇴임했다. 25년 4개월간의 경기일보 생활이었다. 1963년 조선일보 입사로 보면 51년 언론 생활의 마무리였다. 감회가 남달랐을 터지만 인사말은 짧았다. “서로 화합하세요.” 단문(短文)의 명수다운 인사였다. 이후 소(小)칼럼을 간헐적으로 연재했다. 1주일에 한 번꼴로 회사에 들렀다. 하지만, 구내식당에서는 볼 수 없었다. 함께 가자고 권해도 한사코 거절했다. 그가 말한 이유가 이랬다. “(퇴임했으니까) 회사에는 내 숟가락이 없는 거야.” ▶2018년 9월7일. 그의 마지막 기명(記名)이 보도됐다. ‘부음: 임양은 前 경기일보 주필 별세.’ 장례식장은 조용했다. 조문객도 거의 없었다. 경기도 최고의 글쟁이, 보수논객의 상징이던 그를 보내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었다. 돌아보면 이런 쓸쓸한 마무리까지도 예언했었다. 2012년 어느 날, 논설위원 셋이 벌인 ‘낮 술판’에서였다. “종교? 저승? 그런 게 어딨어. 사람은 죽으면 그냥 없어지는 거야. 그냥 무(無)야. 조용히 가는 거지 뭐.”

김종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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