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33. 광주 조선백자요지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33. 광주 조선백자요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시대 ‘도자 산실’… 도공들의 열정이 서린 곳
▲ 사옹원 분원리 석비군
▲ 사옹원 도제조 채제공의 선정비를 비롯한 사옹원 분원리 석비군.

예술사를 공부할 때 흔히 “도자기만큼 좋은 자료는 없다”고 한다. “도자기만큼 한 나라의 문화와 기술의 척도를 제공해 주는 예는 없다”고 한 저명한 예술평론가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도자기는 전 시대에 걸쳐 나타나는 생활용품이자 예술품이기 때문이다. 흔히 토기라 불리는 질그릇의 역사는 단군조선보다 더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도 단군조선부터 조선후기까지 수천 년을 이어온 질그릇의 역사 흐름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너른 들판을 배경으로 태어난 백제의 질그릇에 한국 도자기 특유의 모양과 빛깔을 가지고 있다. 호(壺) 또는 항아리로 불리던 백제의 질그릇은 모양과 선과 빛깔이 둥글고 넉넉하며 부드럽고 따뜻하다. 이러한 특징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로 이어진다. 통일신라에 유약을 입힌 그릇이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고려시대에 청자가 탄생되었다.

그릇 속에 깃든 한국의 미학
조선의 과학기술이 절정에 달했던 세종 연간(1418~1450)에 경기도 광주에 사옹원(司饔院) 분원(分院)이 설치되었던 사실은 주목된다. 이때부터 광주는 무려 400여 년 동안 명품 백자의 생산지로 명성을 떨쳤다. 백자는 1280도에 제작되는 청자보다 더 높은 1300도의 고온으로 제작된다. 얼핏 화려한 청자에서 소박한 백자로의 변화는 예술적으로 퇴보한 것이 아닐까 싶지만, 사실은 기술의 진보가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분청사기가 활발하게 제작되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 전국 185개소의 도기소가 기록된 것을 봐도 당시 얼마나 많은 도자기가 생산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가마터는 번천리ㆍ우산리ㆍ도마리ㆍ무갑리에 있고, 중기의 가마터는 선동리ㆍ상림리ㆍ신대리ㆍ금사리가 있다. 특기할 것은 1752년(영조 28)부터 남종면 분원리에 고정되어 1884년(고종 21)에 민영화하기 전까지 가마터가 운영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곳에서 순백자ㆍ상감백자ㆍ철화백자ㆍ청화백자는 물론 청자와 분청사기 같은 여러 종류의 도자기가 생산되었다.

▲ 무명 도공의 비 (2)
▲ 무명 도공의 비.

분원리 가마터를 비롯한 ‘광주 조선백자 요지’(廣州 朝鮮白磁 窯址)는 1985년에 사적 제314호로 지정되었다. 광주 조선백자 요지는 최근에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광주처럼 400년 이상 긴 세월을 국가가 도자기 생산을 주도했던 사례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광주에는 보존 상태가 좋은 85개소의 가마터를 비롯하여 290여 개소의 가마터가 있다.

광주는 서울과 가깝고 한강을 이용하여 백토와 자기를 운반하기 쉽고, 수목이 무성한 무갑산과 앵자봉이 있어 땔나무를 조달하기 좋았기 때문에 사옹원의 사기제작소인 분원이 설치되었다. 도자기를 제작하려면 좋은 백토는 물론 땔나무가 충분해야 했다. 분원은 설치 초부터 땔나무의 조달을 위해 분원시장절수처(分院柴場折受處)라는 산지를 지정 받아 관리했다. 분원은 약 10년에 한 번씩 수목이 무성한 곳으로 옮겼는데, 한번 분원이 설치되어 땔나무를 채취한 곳은 수목이 다시 무성해질 때까지 비워두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18세기 초 분원은 금사리에 약 30여 년간 운영되다가 1752년(영조 28)에 분원리로 이전되었다.

남한산성면 번천리 일대에서 정교한 상품의 백자, 청화백자편이 수집되었다. 이곳에서 초기의 백자, 청화백자, 청자의 사발ㆍ대접ㆍ접시ㆍ호ㆍ병ㆍ합ㆍ잔 같은 다양한 그릇이 출토되었고, 16세기 중엽부터 설백·청백의 백자를 비롯하여 청화백자ㆍ철회백자ㆍ청자가 제작되었다. 17세기에는 가마의 제작시기와 장소 및 가마의 변천을 알 수 있는 간지가 새겨진 백자가 출토되었다. 18세기 초에는 오향리요지와 1752년 분원으로 옮겨가기까지 금사리요지가 있었는데, 금사리요지에서는 우수한 청화백자가 많이 만들어졌다.
▲ 분원백자자료관
▲ 분원백자자료관

조선 도공의 영광과 슬픔
그런데 이 시기 <조선왕조실록>에 충격적인 사실이 실려 있다. 1697년(숙종 23) 윤3월, 분원에 살고 있는 백성 39명이 굶주려 죽어, 광주부윤 박태순을 추고했다는 기록이다. 이처럼 조선 최고 품질의 백자를 만들었던 분원에 소속된 일류 도공들조차 흉년이 들면 살아남기 어려울 정도로 생활이 궁핍했던 것이다.

양반사대부들의 무리한 요구는 도공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세월이 지나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1783년 10월, 정조가 경기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해 민생을 어렵게 하는 병폐를 수집하도록 지시하면서, 특히 광주 사옹원 분원에서 관원들이 과외로 자기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각별히 살필 것을 지시했다. 1795년(정조 19) 8월, 정조는 경기감사에게 사옹원 제조가 관례로 굽는 자기 외에 기묘하게 기교를 부려 제작한 것들을 별도로 구한다는 사실을 보고 받고 이런 특명을 내렸다.

“분원의 폐단으로 말하면, 백성들과 고을에서 감당해내지 못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고 기기묘묘하게 만들어내는 일이 날이 갈수록 성해져 백토(白土)와 청회(靑灰)를 공급하느라 먼 지방에까지 피해를 끼치고 있다. …만약 명령을 위반하는 폐해가 발생할 경우에는 해당 관원을 즉시 그 지방에 정배하고 나서 장계를 올리도록 하라. 만약 혹시라도 덮어두었다가 적간할 때 드러날 경우에는 경기 감사가 중하게 처벌받는 일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조는 이 내용을 현판에 새겨 사옹원과 광주 분원에 걸어두고 늘 보면서 지키도록 명을 내렸다. 국왕의 이러한 관심과 배려로 이 시대의 문화는 최고의 수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 백자자료관 내부1
▲ 분원백자자료관 내부

여기서 잠시 일본의 사정을 살펴보자.
17세기 초까지 백자를 만드는 기술은 최첨단의 기술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군대 안에 공예부를 조직하여 도공을 사로잡고 도자기를 쓸어갔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하는 까닭이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은 전혀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 지방 영주인 다이묘들의 지원을 받으며 자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 찻잔은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성 하나와 조선 찻잔 하나를 안 바꾼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런 환경에서 조선 도공들은 자신의 이름을 건 도자기를 빚으면서 도자기 산업을 일으켰다. 

일본에서 ‘도자기의 아버지(陶祖)’로 추앙을 받는 이삼평은 처음으로 일본의 백자를 완성했다. 거친 도자기 표면이 매끈한 자기로의 발전은 일본도자사의 대사건으로 기록된다. 이삼평이 막을 연 일본 자기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에도시대에 엄청난 규모의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을 뿐 아니라 일본을 ‘도자기의 나라’로 각인시켰다.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배경에 조선 도공들이 존재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조선 백자의 고장, 광주
한강을 바로 앞에 둔 분원리 요지는 1752년부터 1883년 분원이 민영화되기까지 130년간 운영되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명품 백자와 청화백자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이처럼 분원리 요지는 조선후기 최대 규모의 요지로서 도자사(陶磁史) 연구의 귀중한 공간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그 자리에 초등학교를 지으면서 크게 파괴되어 이제는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수많은 무명 도공들의 땀과 정성으로 조선의 미(美)를 창출한 이곳도 시대의 변화를 거슬리지 못했던 것이다. 조선 말 분원의 운영권이 민간에 넘어간 후, 20세기 초에는 백자 제작소로서의 운명을 다하고 말았다. 대량 생산된 값싼 일본 도자기들이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 백자자료관에 전시된 분원리 출토 백자
▲ 분원백자자료관에 전시된 분원리 출토 백자.
분원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분원 도요지터로 오르는 길 주변에는 아직도 백자의 파편이 발견된다. 학교 뒤편에 분원의 책임을 맡았던 관리들의 이름이 새겨진 공덕비가 서 있다. 공덕비 뒤로는 최근 세워진 분원백자관이 자리하고 있다. 전시관은 작고 아담하지만 조선의 백자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분원이 문을 닫은 후, 일제강점기부터 도자 문화를 재현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광주는 물론 양질의 고령토가 생산되는 이천, 여주일대에 도자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지금은 수백 개의 가마가 세워져 무명의 서러움을 딛고 자유분방한 예술혼으로 백자를 창조한 조선 도공의 맥을 잇고 있다. 광주에서 이천으로 이어지는 길목인 쌍령동에는 ‘무명 도공의 비’가 서 있다. 1977년 도공들의 높은 예술혼과 고귀한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다.

“후손들에게 뛰어난 문화유산을 남겨주고, 온 곳으로 돌아간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넋들이여. 흠모하나니 위로받을 지어다.”

이경석 한국병학연구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