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35. 시대의 무거운 짐을 묵묵히 지고 간 ‘백헌 이경석’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35. 시대의 무거운 짐을 묵묵히 지고 간 ‘백헌 이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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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전등화 조선… 온몸으로 淸의 거센 바람 막아내
뒤에서 바라 본 이경석 선생 묘역
뒤에서 바라 본 이경석 선생 묘역

“도를 어기고 명예를 구하는 것은 진실로 나쁜 것이지만, 도를 어기고 백성을 해치는 것에 비하면 차이가 있거늘, 하물며 백성을 위하는 것은 곧 국가를 위하는 것이니 어찌 백성과 국가가 나뉘어 둘이 될 리가 있겠습니까”<백헌집> 백헌 이경석(李景奭, 1695~1671)이 재상으로 활동했던 효종시대(1649~1659)는 앞 시대가 남긴 과제를 풀어야 하는 역사적 책무가 놓여 있었다.

한편으로 그 시대는 한 해 걸러 흉년이 찾아올 정도로 궁핍한 시대이기도 했다. 백성들의 삶이 곤궁하고 국가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으나 북벌이라는 정책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병자호란은 이경석을 비롯한 조선의 지식인에게 영원히 아물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임진왜란은 7년 동안 이어졌으나 승리로 마무리됐지만, 불과 45일 만에 끝난 병자호란은 진 전쟁이다. 패전으로 겪게 된 고난은 상상 이상이었다. 수십 만의 백성이 포로가 돼 끌려가고 변방의 성곽조차 조선 군사들의 손으로 허물어야 했다. 이보다 더욱 큰 충격은 국왕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한 일이다.

자신이 섬기던 왕이 적장에게 무릎을 꿇는 광경을 목도한 자신에게 삼전도의 치욕 못지 않은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1644년 오랑캐로 불리던 만주족은 자신들보다 100배도 넘는 한족의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나라를 건설했다. 승자가 된청인들은 한족들에게 변발을 강요했다. 저항하던 유학자들 중 일부는 죽음을 불사하고 더러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 이경석이 살았던 시대의 현실은 이처럼 엄중했다.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이경석은 1617년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얻지 못했다. 당시 권력을 장악한 북인들은 인목대비의 폐모찬성론을 올리게 했는데 이에 불응했기 때문이다. 인조반정(1623) 이후 치러진 과거에 다시 급제한 이후에야 종9품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경석은 국왕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했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도원수 장만의 종사관으로 참전해 군량을 수송하고 격문을 써 붙여 병사를 모집했다. 이때 격문의 문장이 좋다는 칭찬을 받았다. 장만이 견책을 받게 됐을 때 이경석은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며 함께 처벌해 줄 것을 요구했을 정도로 곧은 성격이었다. 

1636년 대사헌에 올랐는데 같은 해 중원으로 세력을 넓히고 있던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사신을 보내 군신의 예를 다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이경석은 “우리나라가 청을 시인하는 것은 그 나라 황제를 시인함이다. 청이라 일컫는 것은 결코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분노한 척화파 인사들이 사신이 묵고 있는 숙소 앞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위협을 느낀 사신이 한밤에 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정세가 심상치 않음을 파악한 이경석은 현실을 직시했다. 이때부터 이경석은 주화로 방향을 잡았다. 

1636년 겨울, 팔기군은 조선 최정예 병력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우회해 곧장 한양으로 달려왔다. 뒤늦게 보고를 받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적군이 파천 장소로 삼았던 강화도로 가는 길목마저 차단해버렸다. 최명길이 청군 선봉대를 만나 시간을 끌고 있을 때 이경석은 인조를 호종해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적에게 포위된 남한산성 안에서도 척화냐 주화냐를 놓고 다투었다. 

금관조복형의 문인석
금관조복형의 문인석
절박한 상황 속에서 논쟁보다 인화(人和)가 우선임을 알았던 이경석은 관리들의 상의를 벗어 추위를 무릅쓰고 성을 지키는 성을 지키는 군졸들에게 나눠 줬다. 식량과 땔감이 떨어지고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보고를 받은 인조는 마침내 항복을 결정했다. 삼전도에서의 항복의식은 참담 그 자체였다. 서울로 돌아온 이경석이 도승지의 신분으로 전후 수습에 힘을 쏟고 있을 때 운명적인 일이 벌어졌다. 

청이 인조에게 명과 국교를 단절하고 조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승전비를 세울 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당대의 문장가로 꼽히던 이경전, 장유, 조희일과 함께 선발된 이경석의 글이 최종 결정됐다. 이경석은 자신에게 글을 가르친 맏형에게 편지를 보냈다. “글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 위기에 처한 임금과 나라를 위해 비문을 지은 일로 이경석은 평생 고통을 받아야 했다. 

1649년, 17대 임금으로 등극한 효종이 쉰 중반의 이경석을 영의정에 제수했다. 의정부를 책임지게 된 이경석은 국정의 목표를 안민으로 삼고 우의정 김육이 건의한 대동법을 호서지방으로 확대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듬해 김자점이 청에 조선이 북벌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밀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청은 성곽 보수나 군기를 제작하지 않기로 한 강화조약을 어겼다며 조선을 몰아세웠다. 이때 이경석이 나섰다. “모든 책임은 영의정인 나에게 있고, 임금은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오” 청나라 사신들은 이 주장의 진위 여부를 거듭 확인했다. 당시의 긴박한 사정을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경석 선생 묘
이경석 선생 묘

“칙사가 조사하던 날 영상이 혼자서 담담히 누누이 대답하는 말이 모두 자기에게 죄를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만을 생각하는 그의 의리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청나라 사신들은 이경석을 곧 죽일 것처럼 거칠게 다루었다. 효종이 직접 청나라 사신들이 머물고 있는 관소를 찾아가 선처를 부탁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여 겨우 사형을 면하게 됐으나 이경석은 평안도 의주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됐다.

 효종과 이시백 같은 대신들의 노력으로 영원히 재임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9개월 만에 풀려났지만 청의 감시로 인해 한동안 조정에 출입도 할 수 없었다. 이때도 효종은 이경석에게 자문을 구했고, 이경석은 상소로 정사를 도왔다. 효종이 승하한 뒤에는 정계에서 한발 뒤로 물러섰으나 현종 역시 이경석에게 크게 의존했다. 

효종이 북벌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할 때도 이경석은 “양병에 앞서 양민이 우선”이라며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창을 설치해 백성을 돌보는 일에 앞장섰다. 나라의 힘은 인재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한 이경석은 김집,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를 비롯한 수많은 인재를 발굴했다. 언로가 막히면 나라가 망한다고 믿었던 그는 왕에게 간언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처벌을 받을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여러 차례 구해주었다. 죽음을 앞두고도 상소를 올려 장령 조세환을 구명했을 정도였다.

1668년 현종이 이경석에게 궤장을 하사했다. 과분하다며 여러 차례 사양했으나 현종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왕이 대신에게 궤장을 하사한 일은 이원익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경석은 이에 관한 사실을 송시열에게 전하며 글을 부탁하자 송시열은 축하하는 글에 ‘수이강’(壽而康)이라는 고사를 인용했다. 수이강이란 ‘편안하게 오래 살았다’는 뜻이다. 비난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으나 이경석은 자신이 믿음을 얻지 못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군자의 사귐은 서로 돕고 의로써 권해야 하는 법이지, 어찌 차마 이전의 잘 지내던 관계를 저버리고 준열하게 배척할 수 있겠는가”
묘역 입구에 세워진 신·구도비
묘역 입구에 세워진 신·구도비

이경석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성남의 판교로 옮겨 살다가, 뒤에 지금의 석운동에서 만년을 보냈다. 1671년(현종 12) 9월 23일자 <현종실록>에 이경석의 졸기가 실려 있다. 

“이경석은 집에서 효도하고 우애로웠으며 조정에서 청렴하고 검소했다. 일찍부터 문망(文望)을 지녔었는데 드디어 정승에 올랐다.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늙도록 게을러지지 않았으나, 친분이 두터운 사람에게 마음 쓰는 것이 지나쳤다” 

시절 탓일까. 문상을 다녀온 도승지가 현종에게 주청한 말이 가슴에 남는다. 
“경석은 살았을 때 지독히 청렴했습니다. 죽은 후에 들으니 제사에 갖출 것도 마련할 수 없다고 합니다” 

1985년에 경기도 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된 이경석 선생 묘는 청계산 자락인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에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묘역 입구에 두 개의 신도비가 서 있다.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석을 갖춘 원래의 신도비(1754) 비문은 박세당이 짓고 명필로 이름난 원교 이광사가 글씨를 썼는데 심하게 마모돼 읽기 어렵다. 언덕을 오르면 나타나는 묘소는 아늑하다. 봉분의 오른편에 서 있는 대리석 비는 1751년에 세운 것으로 원교의 필체가 살아 있다. 무덤의 위아래에 커다란 두 개의 바위가 있다. 두 개의 바위가 시대의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난세를 헤쳐나간 백헌의 기개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감상일까.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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