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기를 헤쳐간 京畿人/송암 (松庵) 박두성

어둠에 갇힌 맹인들…손끝으로 세상과 만나다

아침부터 차를 달려 강화군 창우리 포구에 도착했다. 포구에 도착하자마자 코 끝에 짠 비릿내가 진동한다. 강화군 교동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 배를 기다리는 동안 갯벌에는 갈매기들이 평화롭게 모여앉아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니 눈 앞에 보이는…. 잡힐듯 손에 들어오는 작은 섬 교동.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516. 이곳이 시각장애인들에겐 세종대왕과 같은, ‘훈맹정음’을 만든 송암(松庵) 박두성(朴斗星)이 태어난 곳이다. 섬에 도착해 교동면 상용리 516 송암의 생가를 찾았다. 그러나 주인이 살고 있지 않은듯 낡은 대문에 송암의 생가임을 알려주는 표식도 없이 접근금지를 알리는 푯말만 덩그러니 서있을뿐 인적은 없다. 발길을 돌려 주위를 살펴 보니 언덕에 자리잡은, 그가 생전 목회생활을 했던 교동교회가 보인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세종대왕으로 추앙받고 있는 한글 점자(點字)의 창안자 송암(松庵) 박두성(朴斗星).

구한말인 고종 25년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516에서 박기만씨의 6남3녀중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평생을 시각장애교육에 바쳤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8세되던 1895년 7월 무관 출신인 성제(誠齊) 이동휘(李東輝)가 강화도에 보창학교를 세우자 유학, 4년동안 신학문을 배웠고 성제의 추천으로 한성사범학교(경기고교 전신)에서 수학했다. 한성사범학교 졸업 후 어의동보통학교(효제초교 전신) 교사로 발탁돼 8년동안 근무한 뒤 1913년 제생원 맹아부(濟生院 盲啞部:서울맹학교 전신) 설립과 함께 교사로 발령받으면서 시각장애인들의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점자책이 일본어로 된 점자밖에 없다는 현실을 직시, 시각장애인들의 사회적응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시각장애인이 정상인과 같이 직접 읽고 쓸 수 있는 한글점자의 필요성에 절감, 1920년부터 비밀리에 한글 점자연구에 착수했다. 1923년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7년동안의 노력 끝에 1926년 11월4일 한글점자의 초창기 모델을 완성해 한글점자 개발을 선포하기에 이르른다. 이 한글점자는 세종대왕이 선포한 훈민정음을 본따 ‘훈맹정음(訓盲正音)’이라고 불렸다. 당시는 일제치하의 조선어 말살정책으로 모든 학교에서 조선어교육이 폐지된 상황. 그러나 제생원에서 우리 말과 글의 공교육을 계속했고 일제의 서슬퍼런 검인교과서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조선어독본’을 한글 점자로 간행해 시작장애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한 몫 했으며 이를 가르치고 보급하는데 여생을 보냈다.

◇송암의 시각장애인 교육철학

“실명이란 1차적인 장애에 시각장애인이 마음대로 읽고 쓸 한글점자가 없으면 시각장애인의 심안을 밝히지 못하며 이로 인해 제2, 제3의 장애가 중복 심화돼 정서불안, 열등감, 비사회적 행동의 부차적 장애 등을 가져오게 되는만큼 이질적인 방향으로 고착화되기 쉽습니다. 이를 예방하고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시각장애인들에게 문자를 주어 그들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박두성의 애절한 탄원은 결국 총독부를 설득할 수 있었다. 송암의 시각장애인 교육관은 애맹정신의 실천, 끊임없는 권학정신, 생활자립을 위한 교육강화, 잠재능력 개발 등이었으며 이를 위해 평생동안 자신의 몸과 마음을 헌신했다. 송암의 위대함은 한글점자 창안은 물론 한글점자 보급을 통해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의 문맹 퇴치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그는 76종에 이르는 시각장애인용 교육자료를 점역·출판한데 이어 점자도서 보급사업, 통신교육사업, 주간 회람지 ‘촉불’ 발행을 통해 전국의 시각장애인들이 한글점자를 생활화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조선어 점자연구회, 육화사 등 연구조직을 결성해 한글점자를 연구함으로써 그 실용성을 높여 왔다. 1935년 5월 열린 부면협의원(府面協議員) 선거에서 처음으로 한글점자 투표가 가능하게 돼 맹인들의 사회참여가 확대됐고 해방 이후 제헌국회에선 한글점자 투표를 승인받았다. 일제 치하 시각장애인들의 생활은 주로 구전식 교육과 점복업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시각장애 교육에 투신, 한글점자의 창안, 보급, 그리고 교수학습방법의 기반 연구 등을 통해 우리나라 시각장애 교육은 당대에 거의 현대적인 모습을 완성했다. 1963년 타계 후 가족들에 의해 인천시 남동구 수산동 남동구청 옆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순봉(작고)·순대(작고)·희복(미국 거주) 등 아들 3명과 정희(84·화가·동구 화평동 거주)·명희(82·산부인과 전문의·부천시 거주) 등 딸 2명을 뒀다.

◇ 잊혀지는 송암의 생가

인천시 중구는 지난 1991년 12월12일 송암이 장·노년기에 거주했던 중구 율목동 25의1 집 앞에 ‘송암생가 기념비’를 이전, 설치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은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516. 중구는 생가 기념비가 잘못 설치됐다는 지적과 함께 송암이 거주했던 율목동 집을 지난 94년 송암 후손이 다른 사람에게 팔아 기념비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으면서 쓰레기장으로 변하자 지난 2000년 1천만원을 들여 기념비를 인근 율목공원으로 옮겨 직접 관리하고 있다.

현재 송암의 생가와 교동교회는 이종조카인 영재씨(82·파주 금촌제일감리교회 원로목사)와 그 아들인 용호씨(58)·손자 창혁씨(34)가 지키고 있으며 지난 1989년 교동교회 앞에서 온천수(일명 마라쓴물)가 발견되자 하점면 창후리에서 온천장을 운영하면서 하루에 한번 왕래할뿐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후세에 율목동이 송암의 출생지인 것처럼 잘못 전해질 우려가 높은만큼 강화 교동 생가터에 기념비가 세워지게 된 경위와 송암의 정확한 출생지를 설명해 주는 표지판을 설치해 정확한 역사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연보(年譜)

1888년 강화군 교동면 출생 / 1899년 안성사범학교 입학 / 1905년 어의보통학교 교사 근무 / 1913년 제생부 맹아원 교사 / 1913년 점자제판기 도입 / 1920년 한글점자연구 착수 / 1921년 조선맹아협회 결성 / 1926년 한글점자 완성 / 1936년 영화학교 교장 / 1957년 성경 점역 / 1962년 8월 국민포상 수상 / 1963년 타계 / 1997년 정부 한글점자 시각장애인 문자로 고시

{img5,l,000}■인터뷰/송암의 조카 박용호씨

“시각장애인들을 사랑한 박애주의자”

“영국과 미국 등지에선 널리 알려진 인물인데 국내에선 잘 모르고 있고 묻혀지는 것같아 선생님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기념하기 위한 기념관 건립에 착수했습니다.”

강화군 창우리 등대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송암을 기리는 기념관 건립 등 기념사업에 힘쓰고 있는 조카 박용호씨(58)는 송암에 대해 “시각장애인들의 생계 유지를 위해 침술교본 등을 점자책으로 만드실 정도로 시각장애인들을 사랑한 박애주의자”라며 외국보다 저평가되고 있는 국내 현실에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그는 “점자책이 어떻게 생겼는지, 누가 점자를 만들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며 “업적을 널리 알리고 강화를 시각장애인들이 순례하는 성지로 만들기 위해 연말까지 기념관을 건립할 예정이나 강화군의 관심과 지원이 부족해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송암의 강화도 교동 생가를 관리하고 있는 그는 “군부대 등과 협의해야 하는 등 생가를 예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며 “기념관이 완공되면 모든 자료를 한데 모으고 점자로 표기해 장애인들이 꼭 한번씩 다녀 갈 수 있는 성지와 같은 곳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글=이종현기자 major01@kgib.co.kr

/사진=장용준기자 jyjun@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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