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장발장은행

이연섭 논설위원 ysle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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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은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간 감옥살이를 한다. 장발장은 돈도, 힘도 없어서 지은 죄에 비해 가혹한 옥살이를 하게 된 사람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도 벼랑 끝에 내몰려 경미한 생계형 범죄를 저질렀다가 받은 벌금형 때문에 노역장(勞役場)으로 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벌금 미납으로 노역장에 유치되는 사례는 연 평균 4만여 건에 이른다.

경기침체 속 생활고에 음식이나 생필품 등을 훔치는 ‘장발장 범죄’가 잇따르고 있다. 대학교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A씨는 손님들이 받지 않고 두고 간 쿠폰을 챙겼다가 절도죄로 신고당했다. 월급이 몇 달째 밀려 남는 쿠폰으로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등을 사 먹은 게 죄가 됐다. 고용노동부에 임금체불을 신고한 A씨를 눈엣가시로 생각했던 주유소 사장이 그를 절도혐의로 경찰에 신고했기 때문이다. A씨는 결국 벌금 100만 원을 선고받았다. 벌금낼 돈이 없는 A씨를 도운 건 ‘장발장은행’이었다.

장발장은행은 경범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지만 생활고 등 어려운 형편으로 벌금을 낼 수 없는 빈곤ㆍ취약계층을 돕기 위해 2015년 3월 출범했다. 현행 형법상 벌금은 판결 확정일로부터 30일 내에 현금으로 한 번에 내야 하며, 벌금 미납자의 경우 최장 3년간 노역을 해야 한다. 장발장은행은 생계 곤란으로 감옥살이를 해야하는 이들에게 신용조회 없이 무담보·무이자로 벌금을 빌려준다. 자체심사를 거쳐 소년소녀가장,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장애인 등 빈곤ㆍ취약계층에게 최대 300만 원까지 무이자로 대출해주고 있다.

장발장은행은 그동안 개인, 기관, 종교단체 등에서 5천여 명이 후원해 626명에게 11억7천303만7천 원을 대출해줬다. 대출금이 10억 원을 넘어설 정도로 성장했지만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생계형 범죄로 구치소에 갇힐 걱정을 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저자인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은 평소 “장발장은행이 빨리 문을 닫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장발장은행이 필요 없는 세상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장발장은행은 범죄자 경제력에 따라 벌금을 정하는 ‘일수벌금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프랑스, 독일, 스웨덴 등 유럽 여러 국가에서 실시하는 제도로 고소득자가 죄를 저지르면 더 큰 벌금을 내야 한다. 반면 한국 형법은 총액벌금제를 적용해 서민이든 재벌이든 같은 잣대가 적용된다. 새해엔 우리 사회 장발장이 크게 줄고, 장발장은행의 대출도 줄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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