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처절했던 민주화의 외침이 봇물을 이룬 격변의 시기. 지성(知性)의 발원지 상아탑은 낭만과 이데올로기가 혼재했고 학문과 실천적 정의를 찾는 터전이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학내외를 맴돌던 최루탄 가스, 그 속에서 ‘민주(民主)’를 부르짖던 친구들의 외침이 귓가에 쟁쟁하다. 시간이 참 많이도 지났다 싶다. 어느덧 ‘광주사태’로 지칭된 5ㆍ18은 ‘광주민주항쟁’으로 명칭을 달리했다. 써클 룸 깊숙한 곳에서 지켜보던 5ㆍ18 광주필름은 지금은 훤한 극장에서도 맘껏 볼 수 있다. 통수권자 비판이 곧 투옥이란 공식도 사라진지 오래다.
최근 들어 그때 기억들이 새삼 떠오른다.
지난 11일 오후다. 23년 만에 재판대에 오른 전직 대통령의 이야기다. 그의 혐의는 사자(死者) 명예훼손이다. 회고록에서, 5월 항쟁 당시 군 헬리콥터가 기총 사격을 가했다는 조비오 신부의 증언에 대해 ‘가면을 쓴 사탄 또는 성직자가 하는 새빨간 거짓말’로 규정했던 탓이다. 광주를 찾은 그는 뉘우침이 전혀 없었다 한다. 때문에 많은 이들의 공분이 만만치 않다. 그는 이번 광주 길에 또 하나의 단어를 날렸다. 이날 법정에 들어가려는 때였다. 기자들이 “5·18 당시 발포 명령을 내렸습니까?”고 묻자 내뱉은 말, “이거 왜 이래”다. 과거 그가 한 말도 지금까지 심심치 않게 회자된다. “나만 갖고 그래”, “29만 원 밖에 없어” 등등, 웃자면 웃을 수 있다지만 듣기에 너무나 민망한 단어들이다.
우리는 그가 군 출신으로 정권을 잡은 장본인 임을 잊지 않고 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했고 5ㆍ18 민주항쟁으로 유명을 달리한 이들이 많았음도 기억하고 있다. 반성의 시대, 빨리 치유돼야 할 부끄러운 역사다. 그가 비판을 받기까지는 이유가 분명하다. 그는 그 시대 이 나라의 통치권자였다. 때문에 그 어떤 변명으로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반성이라도 듣고 싶어하는 민심이 그렇게 부담이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루 뒤인 12일 오전의 일이다.
이날 서울 한신대 서울캠퍼스 예배당에서 고(故) 문동환 목사 장례 예배가 열렸다. 일제강점기이던 1921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61년 한국에 돌아와 모교인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독재정권과 맞섰다. ‘31 민주구국선언문’ 사건으로 투옥돼 2년 가까이 복역했고, 이후 민중운동에 깊이 참여했다. 동일방직 및 와이에이치(YH) 노조원 투쟁을 지원하다 다시 투옥됐다. 우리는 그를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온 민주투사로 기억한다. 이날 한신대 명예교수 김경재 목사는 “문 목사는 평생 잠든 새벽을 깨우고 새벽을 여는 삶을 사셨고 가난하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면서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만들어야 한다고 독려하셨다”고 회고했다.
필자는 문 목사의 장례에 즈음, 기억나는 대학 동기가 있다. 80년대 민주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정의를 외쳤던 친구다. 그는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작은 키의 당찬 여자였다. 대학 1학년 때부터 뭐가 그리 바빴을까? 해방감에 취해 그런저런 시간을 보내던 필자와는 뭔가 달랐다. 세월이 지나 그런 그가 지난 88년 평화민주통일연구회 출범 때, 98인 중 학생대표로 참여한 사실을 알게 됐다. 바로 문 목사가 이사장으로 참여한 단체다. 그는 이후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문했다. 국정원 댓글공작 진상 규명과 여직원 감금사건 재판, 세월호참사 중앙당 세월호대책위 활동 등 굵직한 국정 현안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지금은 원외에 머물고 있지만, 당내나 언론매체 등을 통한 활동은 남 못지 않다. 앞으로 정치활동이 기대되는 대표적 여성정치인이다. 안산과 서울을 오가며 힘들게 지역 정치기반을 다지고 있는 그를 볼 때 기특하면서도 한편 짠한 생각도 든다. 지난 80년대 기억 속에 생각나는 그 친구는 바로 김현 더불어민주당 제3사무부총장이다.
김동수 지역사회부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