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인천] 내 노래에 작별을 고하다
[함께하는 인천] 내 노래에 작별을 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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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있을 때 노래 흥얼거리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떨어져서인지 혹은 가사가 나오는 노래방 기기에 익숙해져서인지 이제는 즐겨 부르던 정지용의 ‘향수’나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 (My Way)’등 애창곡의 가사를 끝까지 기억하지 못한다. 가사를 기억하는 것은 내가 43년 전 졸업한 고등학교의 교가와 응원가뿐이다.

재학 시절 조회 때마다 불렀고 졸업 후에도 모교 팀의 운동경기가 있으면 목청 높여 따라 부르던 노래들이니, 더 늙어서 치매가 온다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기억하는 노래가 될 것 같다.

독립선언서를 초안하고 민족대표로 삼일만세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으나, 후일 친일로 전향했다고 알려진 시인이 작사한 모교의 교가를 나는 아직 정확히 외운다. ‘잘 집(많은 집)’, ‘즈믄의 아이들(천명의 학생들)’, ‘볼재(현재 현대사옥근처의 언덕)’등 옛 용어가 섞여 있어 역사성도 있다. 일제 시대에 “일본말 교가만 부르라”는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이 웨이’ 를 부른 프랭크 시나트라가 마피아를 등에 업고 연예활동을 하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86년에는 그와 마피아와의 관계를 폭로한 그의 전기 ‘그의 길(His way)’이 출간됐다.

‘향수(1927)’를 쓴 정지용은 나의 고교 선배로서 삼일 운동 때 교내 시위를 주동하다가 무기정학을 받았다. 1950년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사라진 그는 월북시인으로 낙인 찍혀 그의 시들은 출판 정지됐으나 1988년 월북작가들의 해방 이전 작품에 대해 국내 출판이 허용돼, 오늘날 애창곡으로 불리고 있다.

누가 지었건, 누가 불렀건 간에 노래는 노래로서의 의미가 있다.

문득 옛날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어떤 강직한 선비가 여행길에 굶주려 쓰러졌다. 마침 어느 악명높은 도둑이 그를 불쌍히 여겨 더운물에 말은 밥을 먹여 살려냈다. 의식을 회복한 선비가 굶어 죽더라도 도적이 주는 음식을 먹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 모두 토해내려다가, 그만 음식이 기도로 들어가서 숨이 막혀 죽고 말았다”(열자 설부편).

사람은 도둑이었지만 그 밥은 도둑이 아니다. 밥을 준 사람이 도둑이라고 해서 밥도 도둑이라 생각한 것은 명분과 실질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열자는 말했다. 이처럼 경직된 생각은 생명을 위태롭게까지 만드는 것이다.

훌륭한 노래와 시는 시대를 초월해 살아남는 자생력이 있다. 맥아더 장군(1880-1964)의 퇴임사 중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도 옛 군가의 한 구절(Old soldiers never die, Never die, never die, Old soldiers never die, They simply fade away)을 인용한 것이다.

이제 내가 즐겨 부르던 ‘나의 교가’와 작별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 교가의 작사가가 친일의 행적을 남겼다는 이유로 더는 학교에서 부를 수 없게 됐다. 운동장에서 한목소리로 우렁차게 메아리쳤던 교가가 앞으로 후배들이 부를 가사와 달라질 때, 내 머릿속에는 서로 다른 이념이 불러오는 서글픔이 한층 더 물결 칠 것 같다.

황건 인하대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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