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立事不必執事之名:공적을 쌓더라도 과시해서는 안된다>
중국 한나라 유방(劉邦)은 재위 시부터 그의 아들과 조카 모두를 전국 각지에 왕으로 봉했다. 경제(景帝) 때에 이르러서는 변방의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인 번왕(藩王)이 무려 28명이나 달했다. 이 제후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날로 강대해지는 제후국들은 조정의 근심거리였다.
가의(賈誼)와 조착(晁錯)은 황제에게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라고 건의했다.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영지 일부를 몰수하는 등 눈에 보이는 강력하고 다양한 방법을 썼지만 번왕의 세력을 약화시키기는커녕 반발과 논쟁을 일으키고 칠국지란(七國之亂)을 야기한다.
반면 무제(武帝) 때 주부언(主父偃)은 제후들에게 저들의 뜻대로 책봉할 권리를 부여했다. 하지만 적자에게만 재산 상속이 가능케 한 것을 추은령(推恩令)을 통해 모든 자식에게 재산을 고르게 상속하도록 했다. 결국 제후의 재산은 시간이 지날수록 각 자식에게 분할 상속돼 큰 영지를 소유한 제후의 탄생을 막을 수 있었다. 겉으로는 제후의 권리를 부여하면서도 속으로는 추은령을 추진하는 등 본 의도를 숨겼을 때 정치가 성공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는 ‘입사불필집사지명(立事不必執事之名)’, 송나라 시절 영가(永嘉)선생이 지었다는 ‘치국방략(治國方略)’(신원문화사, 2005.9)에 있는 이야기다. 즉 일을 성사시키려면 그 일의 명성을 좇아서는 안 되며 일을 하는데 있어서 보이지 않게 하고, 공적을 쌓더라도 자기를 내세우거나 과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지나친 쇼맨십에 급급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자신의 존재감과 공을 세우기 위해 경쟁하듯 막말 공방도 서슴지 않는다. ‘달창’, ‘사이코패스’, ‘한센병’ 등 민망하고 선정적인 단어가 연일 신문 지상을 장식한다. 막말로 인해 품격 있는 정쟁(政爭)은 사라진 지 오래다.
남북과 경제문제도 마찬가지다. 최근 북한의 단거리 발사체 소식 등 남북 관계는 소강상태다. 3차에 걸친 남북정상회담의 감동은 온데간데없다. 한국의 경제 상황도 녹록지 않다. 최저임금 인상이 무색하게 IMF 이후 최악의 고용한파와 실업률, 90%대의 자영업자 폐업률 등 국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싸늘하기만 하다.
감성을 자극하는 보여주기식 이벤트보단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밀고 당기는 물밑 전략, 인기영합적인 포퓰리즘이 아니라 신중하고 묵직한 정책 추진은 요원한 것일까? 그야말로 명성을 좇다가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 정치인은 공로나 명예를 탐내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는 일이 뜻에 어긋나 목적에 도달할 수 없으며 그들의 지위와 명예는 차치하더라도 그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 몫으로 돌아간다.
명성을 얻은 자들의 불행은 사람들이 품는 지나친 상상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초래된다는 말이 있다. 한낱 거품과 같은 대중적 인기보다는 소신을 가지고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정치인이 많아져야 할 때다.
이도형 홍익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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