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0. 다산 유적지를 찾다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0. 다산 유적지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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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뱃길 이용한 물화 집산지… 다산의 사상 토대 되다
여유당. 탄압받는 남인 가문 출신이라 다산의 조상들은 물론 다산 본인도 ‘신중과 경계’를 좌우명으로 살았다. 그럼에도 그의 재주를 경계한 노론의 탄핵으로 결국 18년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18년 강진 유배가 다산 개인과 가족에게는 어마어마한 시련이었지만, 조선 실학에는 엄청난 행운으로 돌아오는 역사의 아이러니.
여유당. 탄압받는 남인 가문 출신이라 다산의 조상들은 물론 다산 본인도 ‘신중과 경계’를 좌우명으로 살았다. 그럼에도 그의 재주를 경계한 노론의 탄핵으로 결국 18년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18년 강진 유배가 다산 개인과 가족에게는 어마어마한 시련이었지만, 조선 실학에는 엄청난 행운으로 돌아오는 역사의 아이러니.

다산유적지로 들어가는 길은 큰물이 가깝다. 두물머리 큰 물이 차창가로 찰랑대듯 가깝게 보이는 곳을 몇 군데 지난다. 지난 며칠간은 집중 호우까지 내렸으니, 다산의 생애만큼 아슬아슬하다. 어제는 바깥 활동을 최소화했는데도 세 켤레나 양말을 갈아신을 정도로 빗줄기가 거셌는데 오늘은 신기하게도 비가 긋고 움직일 만하다. 다산의 보살핌인가?

나주 정씨는 전라도 나주에서 시작해 고려 때 황해도 배천, 조선조에는 경기도 용인 일원을 세거지로 번성했다. 다산이 자랑하듯 12대조 정자급(丁子伋) 이래 9대 문과 급제에 9대 옥당의 문장가 집안이었다. 오죽하면 정조가 옥당은 ‘정씨가 독차지한다(丁家之世傳物)’고 찬탄했을까. 순탄하던 가문에 마가 낀 것은 다산의 8대조 정윤복 대였다. 정윤복은 서인의 송익필이 조작해낸 정여립 모반 사건 당시 탄핵받고 설 자리를 잃었다. 이후 정씨는 대대로 급제해도 크게 쓰이지 못했다.

작고 검소한 다산의 묘소. ‘명당 차지 말고 뒷산에 묻으라’던 다산의 실질적이며 소박한 마음씨를 짐작케 한다.
작고 검소한 다산의 묘소. ‘명당 차지 말고 뒷산에 묻으라’던 다산의 실질적이며 소박한 마음씨를 짐작케 한다.

두물머리에서 싹튼 실학사상
남양주 마재마을에 터잡은 것은 다산의 5대조 정시윤(丁時潤)이었다. 정시윤은 6살 때 아버지 정언벽(丁彦璧)을 잃고 모친까지 자결해 극히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굳은 의지로 공부해 문과에 급제해 출사했지만, 갑술환국으로 삭탈관직되고 결국 벼슬에 뜻을 잃고 마재마을에 은거하게 된다. 정시윤은 한강 상류 반고(盤皐)에 정자를 짓고 당호를 임청(臨淸)이라 내걸었다. 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라,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불고 맑은 물에 이으러 시를 읊는다, 도연명이 정쟁을 피해 낙향하면서 읊은 귀거래사에서 따온 구절이다. 안동 ‘임청’각과 같다.

당시 마재마을 부근, 물길 따라 10리 거리는 당쟁을 피해온 집안들의 세거지였다. 농지가 부족한 대신 한강 뱃길을 이용한 상품 물화의 집산지라는 장점이 있었다. 한양으로 올라가는 강원도, 경기도 외곽의 땔감과 과일.야채, 남해안에서 낙동강 타고 올라와 충주에서 다시 한강 타고 내려온 물산들이 여기서 점검받게 마련. 마재 부근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일찌감치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정씨 가문도 원예 작물로 생계를 유지했다. 총명한 다산은 어린 나이에도 특용작물의 재배와 상업적 가치를 일찍부터 인식했을 것이며, 오가는 배와 물산, 몰리는 사람을 넘겨봤을 리 없다. 거대한 실학 사상의 토대는 어린 시절 배양되었을 것이다.

다산이 다른 실학자들과 차별화되는 것은, 우선 500권에 이르는 저작물의 방대한 양이다. 사상 체계도 훨씬 거대하지만, 당시 조선의 현실 세계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또 정치 행정만이 아니라 농업과 상공업, 광업 등 다양한 경제, 기술적 분야를 다룬다. 어릴 때 보고 느낀 것이 다산의 실학사상에도 녹아들어 있을 것이다. 일전에 식사를 같이 한 김병일 전 기획예산처 장관은 ‘본 게 다르다’는 표현을 썼다. 동석한 언론인들이 ‘보고 들은 거’라 말하자 ‘들은 거는 중요하지 않고, 어릴 때부터 본 게 다르다’고 굳이 ‘본 것’을 강조했다.

다산 선생의 사당 문도사(文度祠)
다산 선생의 사당 문도사(文度祠)

만일 강진 18년이 아니었다면?
18년 유배 생활은 다산과 가족에게는 참으로 불행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한국 실학의 관점에서는 참으로 소중한 세월이었다. 역사에 만일은 없지만, 다산의 강진 18년은 너무나 많은 만일을 생각하게 만든다. 만일 다산이 18년 유배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만일 외가인 해남윤씨의 세거지 바로 옆이 아니었다면? 만일 어릴 때 보고 느낀 것들이 없었다면? 다산이 유배지에서 가르치고 학문적 성취에 도움을 받은 제자 가운데는 서리 계급 출신이 여럿 포함돼 있다. 만일 다산이 차별적인 시각으로 그들을 가르치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 했다면? 그 방대한 저작이 가능했을까? 저작이 그토록 구체적·현실적일 수 있었을까? 평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일 수 있었을까?추상적 일반론이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풍성해질 수 있었을까?

다산이 귀양살이 초기에 의탁한 주막집 노파와의 대화가 전해진다. 노파가 질문한다. “아버지 은혜가 중합니까? 어머니 은혜가 중합니까?” 다산이 답한다. 유교의 정통 이론에 따라, “부모 은혜를 비교하기 어렵지만 굳이 비교하면 ‘아버지 날 낳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아버지 은혜가 더 중하다.” 노파가 반론한다. “아무리 씨가 좋아도 땅이 이를 받쳐 주지 못하면 씨가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조선 500년 최고의 천재 다산의 말문이 막힌다. 이 일화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연상시킨다. 씨를 길가에 뿌렸더니 새가 쪼아 먹고, 돌무더기에 뿌리니 말라 죽고, 가시덤불에 뿌리니 자라지 못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리니 수십 배의 소출을 올렸다는 비유 말이다. 이때부터 다산의 세계관이 바뀐 것은 아닌지?

여유당, 조심스레 살고 조심스레 잠자기
다산 유적지는 그가 노년을 보낸 집과 세상을 떠난 이후 쉬고 있는 묘소, 그리고 기념관까지 한곳에 있어 20세기 세계 모든 나라가 행정의 모토로 삼는 단일창구 ‘One Window Policy’ 시스템을 가장 잘 구현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기념관과 여유당만 들르지만, 조금 불편하더라도 묘소를 들러 참배할 것을 권한다. 음택과 양택이 이어진 특이한 배치는 굳이 명당을 찾지 말라는 다산의 소박한 생각 때문이다.

20세기 들어 복원한 생가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신중하라, 겨울에 얼어붙은 시냇물 건너듯. 경계하라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이 원전이라 소개돼 있다. 그러나 도덕경의 원문은 ‘여혜(與兮)’가 아니라 ‘예언(豫焉)’이다. 어느 쪽이 되었건 매사 조심 조심해야 했던 다산의 처지가 안쓰럽기만 하고, 조심하고도 유배당한 이후 상황은 더 안타깝다.

유적지 여유당 당호현판.
유적지 여유당 당호현판.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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