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조국 파동’이 남긴 상처
[변평섭 칼럼] ‘조국 파동’이 남긴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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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14세기 초 게슬러라고 하는 독재자가 있었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횡포가 극심하여 시민들의 원성이 높았다. 그런 어느 날 거리 한복판에 말뚝을 세우고 그의 모자를 얹어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의를 표하게 했다. 시민들은 게슬러가 무서워 거리를 지날 때마다 모자를 향해 절을 했는데 빌헬름 텔(영어로는 윌리암 텔)이라는 사람만은 언제나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게슬러는 그를 체포하여 처형키로 했다. 그러면서 사형을 집행하기 전 빌헬름 텔로 하여금 그의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하나 올려놓고 활을 쏘아 맞히면 살려주고 못 맞히면 죽인다는 것이었다.

아들은 아버지 빌헬름 텔에게 걱정 말고 그렇게 하시라고 과녁대에 올라섰다. 그러자 빌헬름 텔은 독재자 게슬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활을 잡았다. 모두가 숨죽여 손에 땀을 쥐고 있는데 빌헬름 텔은 차분히 시위를 당겼다.

순간 날아간 화살은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 아들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정확히 맞혀 떨어뜨렸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달려가 포옹을 했고 수많은 시민들은 박수와 환성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게슬러를 끌어내고 스위스 독립국을 세웠다.

이 전설은 1804년 독일 쉴러가 희곡으로 발표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신뢰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활 솜씨를,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깊이 신뢰했다는 것이다. 이런 신뢰가 없었다면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번 조국 법무장관 청문회와 기자회견, 검찰수사 등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국민들은 우리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대로 무너져 버렸을 것이다. 그가 법무장관에 임명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지도자들 모습에 대한 실망 때문이다.

얼마나 그가 정의를 외쳤던가. 얼마나 많은 미사여구로 공정사회를 외쳤던가. 그런데 베일을 벗겨보니 너무 처참했다.

링컨 미 대통령은 “모든 이가 인생의 경주에서 경쟁을 벌일 수 있도록 열린 공간과 공정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링컨이 위대한 것은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이 말로 끝나지 않고 실천하다 죽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2017년 5월10일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링컨 대통령의 연설과 같은 취지의 공정과 평등이 핵심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 단어들이 가슴으로 공감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가?

조국 법무장관은 교수 시절 “모두가 용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고 했다. 공정, 정의, 평등이 그들만의 것이니 개천의 개구리나 붕어 따위는 꿈도 꾸지 말라는 말로 들리는 것은 왜일까? 그렇다고 해도 개천의 붕어나 개구리에게 상처는 주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상처가 너무 크다. 바로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 실망, 분노 때문이다. 이걸 진보·보수 ‘진영논리’로 모는 것은 잘못이다. 최소한의 인간사회의 신뢰, 양심 문제이다.

임진왜란 때 서울을 버리고 평양으로 피난갔던 선조가 다시 왜군이 가까이 오자 또 피난길에 나섰다. 그때 백성들이 평양 성문을 에워싸고 만류를 했다. 그러자 임금은 ‘정행(停行)’이라는 글을 써 붙여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피난가지 않고 평양에 남겠다는 것이다.

이 말을 믿고 백성들이 흩어지자 선조 임금은 의주로 급히 피난을 가고 말았다. 임금이 내건 ‘정행(停行)’을 믿었던 백성들은 얼마나 실망하고 분노했을까? 그렇게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는 데는 신뢰가 생명이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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