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균의 사할린 견문록] 4. 브이코프 탄광과 가가린 공원 공연
[이해균의 사할린 견문록] 4. 브이코프 탄광과 가가린 공원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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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 없이 석탄캐며 고단했던 삶… 강제징용 현장 먹먹
가가린 공원 공연을 끝내고
가가린 공원 공연을 끝내고

고장 난 버스는 일어설 줄 모르고 시간은 표식 없이 떠내려갔다. 예술가 집단은 시간도 아랑곳 하지 않는 몰지각함이 있는 것일까. 이 상황에서도 각기 할 수 있는 장기를 풀어놓았다. 커다란 머윗대를 쓴 채 희로애락을 표정으로 연기하는 팀, 오카리나를 연주하는 팀, 조그만 병뚜껑에 보드카를 따라 마셔대는 팀, 풀피리를 부는 팀, 모두가 그냥 있지는 않았다. 얼마를 지났을까 하늘의 먹구름이 잔뜩 겁을 주고 있을 때 가까스로 교체투입 된 버스가 도착했다. 우리나라 보험회사의 서비스 차라면 금방 와서 해결했을 것이지만 이곳은 더뎠다. 새삼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세계적인 것 같다는 걸 이런 상황에서 느낀다. 시골 논두렁에서도 15분이면 짜장면을 시켜먹을 수 있는 위대한 배달의 민족인 까닭이다.

차는 다시 달렸고 우리의 한인 2세 가이드는 또다시 본인 가족의 사할린사를 이어갔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사운드트랙 쥬라블리(백학)도 멋지게 불렀다. 길가의 푸른 숲을 밀어내며 달리는 버스, 차창 밖 풍경은 이국적인 전통가옥들만 가끔씩 스쳐간다.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해 보았지만 시골 풍경은 모두가 그 나라의 전통가옥이어서 목가적인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시골 풍경은 전통가옥이라고 하기 엔 다소 어정쩡한 풍경이어 아쉬웠다. 한옥도 양옥도 아닌 주택은 전통 격자문이 사라지고 미닫이문, 유리 창문, 목재 도어가 혼재되어 있다. 초기 새마을 사업은 아름다운 돌담을 모두 떴어내고 벽돌담을 쌓는다거나 초가집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꿔놓았다. 슬레이트지붕의 석면은 환경에 큰 문제가 되어 지금 시골엔 철거도 할 수 없는 흉물이 되어있다. 남미와 동유럽의 빨간 기와지붕, 일본의 목조 가옥, 동남아의 수상가옥 네덜란드의 풍차마을들도 특색이 있다.

얼마를 달렸을까 비로소 브이코프(나이부치) 탄광이 등장했다. 높다란 선탄 라인이 엉켜있고 띄엄띄엄 주택들이 보였다. 모두가 떠나간 우리나라의 태백이나 사북 고환의 여느 폐광과 비슷한 풍경이다. 갱도 입구는 모두 폐쇄돼 들어가 볼 수 없었지만 가이드의 설명으론 이곳에 징용 온 한인들은 하루 2t의 석탄을 캐내어야 했다고 한다. 2t이면 상상이 가지 않는 엄청난 양이다. 쉴 새 없이 일해야 했던 그들의 고단했던 삶을 위로하며 우리는 준비한 국화꽃을 헌화했다. 오카리나연주가가 아리랑을 연주하자 모두들 따라 합창했다. 너무 슬퍼 떨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강제징용 온 동포들의 무슨 단서라도 느낄까 하여 흙속을 뒤져보았다. 붉게 녹슨 광물들만 여기저기 박혀있었다. 흙을 어루만져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다시 이곳을 떠난다. 그분들을 회억하고 추모하는 시간은 오가는 긴 시간에 비해 너무나 짧았다. 그놈의 버스가 고장 난 탓에 아쉽게도 공동묘지도 가보지 못했다. 이곳엔 탄광에서 일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묻힌 공동묘지가 있으며 2018년 사할린 무연고 희생자 추모관을 완공하여 넋을 기리고 있다고 한다. 그나마 이국땅에 강제징용 온 그들의 외로운 죽음이 덜 외로울 것 같다.

이미 가가린 공연도 늦어졌으니 어쩔 수가 없다. 뒤돌아선 버스는 질주를 시작했다. 덜컹대는 도로는 포장의 거죽이 모두 달아나고 움푹 팬 속살을 드러냈다. 아주 오랜만에 60, 70년대 시골 비포장도로를 통학하던 추억이 생각났다. 뒷좌석에 앉으면 엉덩이가 디딜방아 찧듯 튀어 올랐다. 열대 우림 같은 숲이 빠르게 스쳐가고 간간이 목장도 보이는데 무엇보다 드문드문 나무전신주가 눈에 띄어 향수적이었다. 유채 같은 노란 야생화가 끝없이 펼쳐있고 흐르지 않는 철로는 군데군데 높다란 침목만 쌓였는데 무엇보다 양산만큼 커다란 머위대가 모든 들판을 장악하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브이코프 탄광
브이코프 탄광

버스는 다시 호텔에 도착했고 우리는 가가린 공원의 공연장으로 갔다.

큰 대자보 현수막 천에 먹을 묻힌 전기중 작가는 “눈을 감아도 꺼지지 않는 눈물”이라고 썼다. “아득한 그리움은 꽃으로 피어나고” 등의 주제문도 썼다. 나는 사할린 강제징용자들을 생각하며 얼굴 하나를 그렸고 그 옆에 “그리움은 사랑으로 돋아나고”라고 썼다.

어제 한인 식당에서 본 <새 고려 신문>의 내용그대로다. 신문에 실린 기사는 이랬다.

“경기민예총 대표단 27명이 6월18일부터 22일까지 사할린을 방문할 예정이다. 민예총은 진보적 예술단체로 알려져있다. 경기민예총은 6월20일 오후 4시 유즈노 사할린스크시 가가린 공원에서 <아득한 그리움은 꽃으로 피어나고>란 문화행사를 열 것으로 전해졌다. 이 행사엔 유즈노사할린스크시 문화부가 협력한다. 주최 측은 사할린 동포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했다.”

이어서 어제 한국문화센터에서 공연했던 한인3세들의 장고연주가 시작되었다. 난타와 비슷한 공연인데 16~19살 되는 청소년들이다. 공연은 정말 멋졌다. 젊고 박력 있고 흥미로웠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준비한 풍물에 손색없는 파워와 변화무쌍함이 돋보였다. 이 공연은 현지인들에게도 많은 박수를 받았다. 다음 공연은 현대무용이다. 6명의 회원들이 신발을 벗어 던지고 무용수는 사할린 강제징용자들의 넋을 기리는 내용의 퍼포먼스인데 긴장감 있고 아름다운 표현이었다. 또 다른 무대는 은은한 한복을 차려입은 한인아주머니들의 공연이었는데 대중가요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췄다. 대중가요가 이렇게 멋진 구성이 되다니. 이곳의 한인들은 한 단계 비약한 현대적 느낌의 공연을 하여 놀라웠다. 아마도 서양인들과 살다보니 조금씩 진화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보았다.

이어서 우리 공연단의 주특기이자 파이널공연인 강강수월래가 시작되었다. 현지인들도 달려 나와 어른아이 함께 손을 맞잡고 덩실덩실 춤을 췄다. 아무래도 강강수월래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는 흥과 힘이 체면 없이 솟구치는 것 같다. 멋진 공연을 현지인과 한인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젊은 한인 공연단의 장고 팀은 아무래도 올 겨울, 아니면 내년 여름쯤 한국을 방문하여 함께 연습하고, 한국 고유의 국악을 배우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마음이 합쳐지면 언젠가 이뤄지리라. 우리는 함께 사진을 찍으며 다음을 기약했다.

강강술래로 하나 된 현지인과 한인들
강강술래로 하나 된 현지인과 한인들

오늘은 한식으로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생태탕이라고 해야 할까, 해물탕이라고 해야 할까, 오랜만에 시원한 국과 김치를 먹으며 보드카 몇 잔을 기울였다. 선비 같던 경기도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김종길 선생이 오늘은 전혀 마시지 않던 보드카를 잘도 받아넘긴다. 여기에 더해 자청해서 노래 한곡을 뽑겠다고 일어섰다. 노래는 의외로 성공적이었다.

푸른 물결 춤추고 갈매기 떼 넘나들던 곳. 내고향집 오막살이가 황혼 빛에 물들여간다.
어머님은 된장국 끓여 밥상 위에 올려놓고 고기 잡는 아버지를 밤 새워 기다리신다.
그리워라 그리워라 푸른 물결 춤추던 그곳. 아 아 저 멀리서 어머님이 나를 부른다.


그가 부른 <어부의 노래>가 비교적 괜찮은 호응을 얻은 것은 아마도 그의 고향 신안 앞바다를 그리워한 데서 감정 이입이 충분히 따라주었기 때문일 터이다. 이곳에서 나는 지난해 경기도 미술관에서 기획한 “코리안 디아스포라, 이산을 넘어” 에서 보았던 주명수, 조성용 두 한인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보드카를 내놓아 함께 마신 끝에 호텔근처의 맥주 바까지 함께 갔다. 이곳에서 마신 수제흑맥주는 일품이었다. 술은 화학적 기능과 생물학적작용 외에 사람과 사람을 익숙한 듯 이어주는 용기와 함께 은근슬쩍 속임수가 있어서 좋다. 나는 이곳에서 누가 시키지도 않은 상주 함창가 한 대목을 그만 결정적으로 꺼내 부르고 말았다.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큰 아가/ 연밥 줄밥 내 따주마 우리 부모 섬겨다오
문어야 대전복 손에 들고 친구 집으로 놀러가자/ 친구야 벗님은 간 곳 없고 조각배만 남았구나.
<후략>


정성을 다한 나의 노래를 두고 A씨(의정부)는 짧아서 좋다고 했고, 누군가는 화를 내기도 했으며, 송창 선생은 가사를 문제 삼았다. 괜히 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여러 가지구전 가사가 있으나 나는 공갈못 근처에서 시집오신 큰어머니가 가끔 부르시던 가사가 머릿속에 박혀있어 다른 가사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해균 수원민족미술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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