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원전사고, 대책 서두르자] 동일본 대지진 재앙 비껴간, 이와테현 후다이 마을을 가다

유비무환 촌장의 고집, 마을주민 2천600명 살렸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께 미야기현 동쪽 100km 해상에서 리히터규모 9.0의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했다.

지진은 지역에 따라 최대 43m 높이의 쓰나미를 몰고왔다.

건축물붕괴 및 반파 40만827채, 농지피해 2만1천476ha, 어선피해 2만8천612척 등 피해지역 주민들의 생업까지 앗아간 재앙이었다.

이처럼 태평양 연안지역이 모두 피해를 입은 가운데 유일하게 타격이 없는 지역이 있다.

이와테현 시모헤이군 후다이마을이다.

센다이 공항에서 자동차로 4시간거리에 있는 후다이마을은 북위40도선에 위치해 1천126세대, 인구 2천646명이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어묵이 특산품인 작은 마을이다.

동일본대지진 당시 22.5m의 쓰나미가 덮쳤음에도 어선피해만 있을 뿐 침수, 건물파손 없이 마을 내에서는 실종자 1명만 남긴 채 무사히 빗겨갈 수 있었다.

당시 후다이마을을 지켜준 것은 ‘마을 사람을 구한 촌장의 집념’이라는 주제로 국내외 교육 사례를 통해 종종 소개 되는 후다이수문과 오타나베 방조제다.

높이 15.5m 폭 205m의 후다이수문과 높이 15.5m 폭 155m의 오타나베 방조제는 일본정부와 이와테현청의 지원을 받아 36억엔이라는 거액의 예산이 투입돼 1984년 완공됐다.

동일본 대지진을 피한 일본 이와테현 시모헤이군 후다이 마을 전경. 송길호기자
동일본 대지진을 피한 일본 이와테현 시모헤이군 후다이 마을 전경. 송길호기자

수문건설을 주도한 와무라 고토쿠 촌장은 총 439명의 생명을 앗아간 1896년, 1933년 산리쿠 지진 쓰나미 피해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수문건설을 주장했다.

특히, 와무라 촌장은 1933년 지진을 겪은 인물로 생전 자서전을 통해 “복구작업을 할 때마다 마을 사람들 시신이 나온 기억이 있다”고 했다.

또 당시 경험이 수문 건설을 주장하는 토대가 됐다.

그러나 수문건설에 36억엔이라는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탓에 주민들의 많은 반발을 샀다.

동일본대지진 당시 쓰나미로 인해 후쿠시마현, 미야기현, 이와테현은 주요 건물과 도로에 당시 쓰나미가 어느정도 높이로 왔는지 알 수 있는 표식, 간판이 있지만 후다이마을에서는 볼 수 없다. 후다이수문이 쓰나미를 막아준 덕분이다.

수문 앞 휴게소 판매원인 아리사 루리코씨(여)는 “당시 작은 마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돈이 었기 때문에 대부분 마을 사람들이 반대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일부 주민들은 촌장(와무라)이 뒷돈을 받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강했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마을 전체가 이사 갈 수 있는 돈이라며, 차라리 마을을 옮기자는 비아냥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일본대지진 이후 와무라 촌장에 대한 후다이마을사람들의 존경심이 높아졌다.

촌장 공덕 기리는 비석.
촌장 공덕 기리는 비석.

아리사씨는 “지진 이후 썰물현상 10여초 만에 엄청나게 높은 쓰나미가 몰려왔다”며 “괴물 같은 파도를 막은 수문, 그 순간 다들 와무라 촌장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또 그녀는 “인근지역에 사는 친구 동네가 폐허인 것을 보고 촌장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높아졌다”고 했다.

후다이마을 주민들은 동일본대지진 이후 와무라 촌장의 공을 기리기 위해 수문 옆에 비석을 세워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후다이마을에 중요한 것은 언젠가는 다가올 재난에 대한 대비다.

후다이촌청은 대지진이후 마을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재난에 대해 차분히 대비하고 있다.

후다이촌청은 ‘재해맵’이라는 것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배포하고 있다.

이 매뉴얼에는 지진발생 순간부터 3일동안 행동요령, 대피자세, 쓰나미 높이에 따른 피난처 뿐만 아니라 토사 위험까지 모두 고려해 대피할 수 있는 장소 35군데를 총 망라한 매뉴얼이다.

뿐만 아니라 쓰나미를 겪지 않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 어린이, 청소년을 위해 당시의 피해, 복구 기록을 시간별로 남긴 책자를 제작해 교육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일본 이와테현 시모헤이군 후다이수문 전경.2011년 3월15일 쓰나미가 몰려왔던 이와테현 시모헤이군 후다이수문 밖, 해안가 피해지역(왼쪽)모습과 현재 복구된 해안가 모습. 송길호기자
(사진 왼쪽부터) 일본 이와테현 시모헤이군 후다이수문 전경.2011년 3월15일 쓰나미가 몰려왔던 이와테현 시모헤이군 후다이수문 밖, 해안가 피해지역(왼쪽)모습과 현재 복구된 해안가 모습. 송길호기자

노조 후다이촌청 총무과 주사는 “메뉴얼에 맞게 1년에 봄, 가을 두 차례씩 마을 주민 모두가 참여한 대피 훈련을 한다”며 “마을 사람들 모두 어디로 어떻게 대피해야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이어 “이제는 쓰나미 경보가 울리면 수문을 촌청에서 바로 내릴 수 있다”며 “직접가는 위험을 감수 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동일본대지진을 이겨낸 후다이마을의 교훈은 함께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을 위한 일은 그 어떤 반대를 무릎쓰더라도 해야한다’는 와무라 촌장의 신념이 그 시발점이었다.

이후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할 일을 해낸 사람들, 그리고 언젠가 또 다시 쓰나미가 올 것이라 믿고 차분히 대비하는 후다이촌청과 주민들의 준비자세는 재난재해 때마다 책임논란, 대비미비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는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길호기자

 

[인터뷰] 동일본 대지진때 구지소방서 후다이 분청장 쿠마가이씨

“쓰나미 잊지 말아야… 언젠가는 다시 닥친다”

“쓰나미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는 다시옵니다”

동일본대지진 당시 구지 소방서 후다이 분청장 쿠마가이 마사시씨는 2011년 3월11일 오후 2시45분께 쓰나미 경보가 발령되자 대원들과 함께 직접 후다이수문으로 이동해 쓰나미가 도달하기 전에 수문을 닫은 인물이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재난 경보가 울리자 곧바로 자동차를 타고 수문을 닫으러 갔다”며 “그런데 전압문제로 수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고 아찔한 당시 상황을 말했다.

수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자 일단 쿠마가이씨는 수문의 가장 높은 지점으로 이동해 1차 쓰나미가 멎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이후 1차 쓰나미가 멎어지고 나서 전압문제를 해결한 후 버튼을 눌러 수문을 내려 밀려오는 쓰나미를 막았다.

쿠마가이씨와 동료 소방관들의 발 빠른 대처로 쓰나미는 수문의 15.5m를 초과한 22.5m가 왔지만, 마을까지는 닿지 않고 바다와 연결된 마을 하천의 수위만 높아지는 수준을 보여 마을의 피해를 막았다.

그는 “쓰나미는 강했다. 파도가 수문에 부딪칠 때마다 흔들림이 있었다”며 “3번 정도 쓰나미가 왔는데 4번째까지 왔으면 수문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일각에서는 쿠마가이씨가 수문을 직접 수동으로 내렸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미소를 띠었다.

그는 “그건(수문 수동작동) 거짓말이다”며 “정확히는 직접 버튼을 눌러 조작하는 일이었다”고 했다.

후다이수문의 수문 1개의 무게는 36t이며, 이를 사람이 내리려면 하루 이상 소요된다고 한다.

쓰나미 이후 바뀐 구조 매뉴얼이 있느냐는 질문에 쿠마가이씨는 “그날이 지났다고 해서 바뀐 것은 없다”며 “해왔던 대로 하면 된다”고 했다.

쿠마가이씨는 한국과 일본의 소방관들에게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자기 주변을 지킬 수 있다면, 다른 이들도 지킬 수 있다”며 “훈련을 실전처럼 하면, 그것이 현장으로 이어진다”고 조언했다.

일본 후다이마을=송길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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