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6. 경북 예천, 예천 권씨 초간종택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6. 경북 예천, 예천 권씨 초간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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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절승’의 명당… 고아한 선비의 삶, 자자손손 이어져
기단 위에 자리잡은 별당 / 사랑채 즉 별당은 오늘날은 대부분 사라진 조선 전기 접객형 살림집의 특징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한다. 특히 포형동자주라든지 대들보 위의 눈썹반자는 희귀한 예다. 예천이 병화를 피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기단 위에 자리잡은 별당 / 사랑채 즉 별당은 오늘날은 대부분 사라진 조선 전기 접객형 살림집의 특징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한다. 특히 포형동자주라든지 대들보 위의 눈썹반자는 희귀한 예다. 예천이 병화를 피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정자는 계곡물이 휘돌아 흐르는 큰 바위 위에 날아갈 듯 서 있다. 바위와 물과 노송의 기괴한 조화, 자연과 정자의 아름다운 조화, 귀한 터와 명저의 조화, 선현과 후학의 지적 대화. 자연과 인간이 겹겹이 어우러지는 곳. 정자와 노송과 바위는 높고, 계곡도 물도 숲 그늘도 깊다. 때마침 태풍 미탁이 지나간 직후라 용문산에서 내려온 석간수는 계곡에 넘칠 듯 바위를 때리며 울부짖는다. 숲과 계곡, 바위와 정사를 합쳐 명승 51호 경북 예천의 ‘초간정 원림’이 된다. 초간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가 낙향해 공부하던 터전이다. 초간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등 동문도 쟁쟁하다. ‘정(亭)’은 시를 읊는 풍류 공간이요, ‘정사(精舍)’는 강학과 집필 공간이니 원래 이름 초간정사(草澗精舍)가 맞다. 정자 뒤에 초간정사(草澗精舍), 앞에 초간정(草澗亭), 옆에 석조헌(夕釣軒), 현판 셋이 걸렸다. 초간정 편액은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글씨다. 천하절승은 세인의 시선을 모으던 주말 드라마로 더 유명해졌다. <미스터 션샤인>의 여주인공 애신이 글을 읽고 일하던 배경이었다.

천하절승 예천 초간정, 인간과 자연의 조화
‘초간’은 당나라 시인 위응물(韋應物)의 ‘저주서간(州西澗)’의 “홀로 계류가에 자라는 우거진 풀을 사랑하노니(獨燐幽草澗邊生)”에서 따왔다. 고아한 선비의 모습이다. 성리학의 창시자인 송나라의 염계(濂溪) 주돈이(周敦)가 뜰에 자라는 풀을 뽑지 않고 두고 보면서 천지 기운이 생동하는 모습을 관찰했다는 고사는 거창한 우주 철학자다. ‘초간(草澗)’, 풀(草)에는 자연의 섭리가 계곡물(澗)에는 우주의 원리가 숨어 있다 하니!

지정문화재 비 / 사랑채 앞 지정문화재 비.
지정문화재 비 / 사랑채 앞 지정문화재 비.

한민족 최초의 백과사전 탄생… 프랑스 백과전서파보다 200년 앞서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실학자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1618)이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배웠는데, 그게 아니다. 30년 앞선 1589년, 초간정에서 한민족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이 완성됐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달랑베르(D’Alembert)와 디드로(Diderot)가 백과사전을 출간하기 170년 전이었다. “중국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은 어제 일처럼 밝은데, 동국의 일은 아득히 문자가 없던 시대의 일처럼 어둡다. 눈앞을 보지 못하면서 천리 밖을 보려는 것 같다.” 초간의 탄식이다. 오늘날 학문하는 자들도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았는지?

초간은 중국의 음시부(陰時夫)가 지은 ‘운부군옥(韻府群玉)’의 체제를 빌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표제어 2만 성어, 인명 1천700조목으로 정리해 20권 20책에 압축했다. 대동운부군옥이 현세에 전해진 것은 초간의 치밀한 성품 덕분이다. 당초 3본을 베꼈는데, 학봉 김성일이 국가 간행을 위해 한 질, 한강(寒岡) 정구가 또 한 질 빌려갔고, 그게 임진왜란으로 또 화재로 소실됐다. 아들 권별이 보관하던 나머지 한 질이 살아남아 전해지고 목판과 초판본이 ‘초간일기’ 3책과 함께 보물로 지정됐다.

초간종택 사랑채
초간종택 사랑채

압도적인 위용의 초간 종택… 2중 기단 위의 오량가 양통집
초간정에서 북두루미산을 사이에 두고 서북쪽 2㎞ 죽림마을에 예천 권씨(醴泉 權氏) 초간종택이 있다. 죽림은 조선 태조가 도읍으로 고려한 적 있는, 정감록의 이른바 10승지지의 하나다. 죽림에 세거하던 예천 권씨는 원래 고을 호장을 세습하던 흔(昕)씨였는데, 고려 충목왕(忠穆王)의 이름 흔(昕)을 기휘(忌諱)하느라 외가 성씨인 권(權)으로 바꿨다 한다. 조선조 들어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막대한 피해를 보고 한동안 조정에 출사하지 않았다. 초간정도 두 차례나 불타 없어진 것을 100여 년 후 현손 권봉의가 중건한 것이다. 십승지지가 무색하게 고초가 잦아서일까, 예천 권씨 문중에는 부불백석, 권불진사(富不百石 權不進仕)라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재산은 백 석을 넘지 말고 벼슬은 진사를 넘지 마라. 낮추고 낮춰라.

초간종택은 15세기 말 초간의 조부 권오상이 지었다. 서쪽 주산을 등지고 동쪽 벌을 바라보는 서향 안채는 2중 기단 위에 높이 자리 잡아 위용이 압도적이다. 오량가 양통집 전면 5칸인데, 4칸 대청을 가운데 두고 남에 ‘田’자형 4칸 안방, 북에 단칸 건넌방을 두었다. 건넌방 앞에 단칸 마루를 달고, 안채 양끝에서 단칸 날개 채를 달아냈다. 남쪽 날개 채에 안채 부엌을 두고 북쪽 날개 채는 아래에 협문-사랑채 후원으로 통하는- 위에 다락을 두었다. 날개채 끝에 안대문 행랑을 이으니 전체적으로 ‘ㅁ’자가 된다. 안채 북쪽에는 사당이, 동남에는 ‘대동운부군옥’ 목각판이 보관된 백승각(百承閣)이 자리 잡았다.

초간정 팔작 지붕으로 전면 세 칸 측면 두 칸, 가운데 방 한 칸을두고, 계곡 쪽에 계자난간을 붙였다. 마루기둥에 기대앉아 태풍 미타로 불어난 계곡 물소리를 들으니 선경이 따로 없다. 계곡의 바위 위에 지어졌으니 성경에서 말한 ‘반석 위의 집’이지만, 두 번 불탔다가 다시 지어지는 험한 운명을 짊어졌다. 권문해가 죽은 이듬해 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인조 조인 1626년 아들 죽소(竹所) 권별(權鼈)이 재건한 정사도 역시 화재로 타고 말았다. 영조조인 1739년, 현손인 권봉의(權鳳儀)가 100년 넘어 방치된 정사를 다시 세운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정사다. 김구철 시민기자
초간정 팔작 지붕으로 전면 세 칸 측면 두 칸, 가운데 방 한 칸을두고, 계곡 쪽에 계자난간을 붙였다. 마루기둥에 기대앉아 태풍 미타로 불어난 계곡 물소리를 들으니 선경이 따로 없다. 계곡의 바위 위에 지어졌으니 성경에서 말한 ‘반석 위의 집’이지만, 두 번 불탔다가 다시 지어지는 험한 운명을 짊어졌다. 권문해가 죽은 이듬해 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인조 조인 1626년 아들 죽소(竹所) 권별(權鼈)이 재건한 정사도 역시 화재로 타고 말았다. 영조조인 1739년, 현손인 권봉의(權鳳儀)가 100년 넘어 방치된 정사를 다시 세운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정사다. 김구철 시민기자

초간 종택 사랑채(별당)의 가치… 보기 드문 조선 전기 접객형 건물
안채 동북 모서리에 붙은 사랑채 즉 별당은 조선 전기 누각형 접객 건물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드문 사례로 보물 457호다. 전면에 높은 축대가 있고 대청에 계자 난간이 붙어, 뒤쪽에서 올라야 한다. 별당은 전면 4칸, 측면 2칸의 양통집으로 5량가이며 사방에 쪽마루를 덧달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남쪽 두 칸에 온돌을 두고 나머지 6칸은 대청이다. 대청 대들보 위에 짜 넣은 눈썹 반자에는 칼과 창, 활 등 무구를 비치해 전란에 대비했다고 한다. 대청과 온돌방을 구분하는 3분합 불발기창이 띠살부늬 덧문과 잘 어울린다. 별당 뒤로 2칸의 날개채를 달아 신발을 신지 않고 안채로 드나들 수 있다. 건넌방의 4배나 되는 안방, 행랑과 익랑으로 안채와 사랑채의 긴밀한 연결, 그리고 연화두형 첨차를 사용한 포형동자주와 하엽(荷葉) 위에 포대공을 올린 화려한 대공 장식 등이 접객형 건물의 특징이다. 조금 늦게 지어진 부근의 의성김씨 남악종택도 비슷한데,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은 학봉 김성일의 동생으로 예천 권씨의 사위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학봉 김성일 5형제가 모두 급제해 5자 등과로 크게 이름을 떨치니, 스승 퇴계 이황 선생의 이름이 비로소 중앙 무대에 알려졌다고 한다.

종손 권영기 씨는 몸이 불편해 예를 갖추지 못한다고 송구해한다. 진성 이씨 두루 종택에서 자란 종부는, 필자가 안동 하계 출신이라 하니 외손이라고 반가워하며 대추와 밤, 오미자차를 차려내 주신다. 집만 접객형이 아니다. 봉제사 접빈객의 가풍은 아직도 살아있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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