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칼럼] ‘부르주레타리아’-배반의 新계급
[김종구 칼럼] ‘부르주레타리아’-배반의 新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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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에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안으론 철저한 부르주아 사상
‘공산당 선언’ 농락하는 변종

부르주아적 특권을 향유하면서 프롤레타리아적 혁명을 말하는 것. 노동 귀족 계급이다. 부르주아적 자산을 움켜쥐고서 프롤레타리아적 평등을 말하는 것. 공산 귀족 계급이다. 이들은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를 버린 적이 없다. 여전히 그 이익 속에 산다. 그렇다고 프롤레타리아적 혁명 구호를 버리지도 않는다. 여전히 외쳐대긴 한다. 눈앞의 사익과 혁명의 결실을 둘 다 가지려는 계급, ‘부르주레타리아(bourg-letariat)’다.
‘공산당 선언’은 이렇게 썼다.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동직조합의 우두머리와 직인, 요컨대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는 항상 서로 대립하여, 때로는 숨어서 때로는 공공연한 투쟁을 끊임없이 계속해 왔다.”
그러나, ‘부르주레타리아’ 노동자는 ‘선언’ 속 ‘동직조합 우두머리’를 따라간다. 다른 노동자와 차별화된 특권을 추구한다. 다른 노동자와 견줄 수 없는 부를 축적한다. 특정 노동 집단만의 세계다. 필연적으로 다른 노동집단과 투쟁한다. 그들만의 권력과 부를 위한 배타적 투쟁이다. 자본가와의 투쟁은 어느덧 다른 노동자와의 이익 투쟁으로 바뀌어 있다. 노동자를 팔아 만든 특정 노동자들만의 세상이다. 노동자 배반이다.
‘공산당 선언’은 또 이렇게 썼다. ‘부르주아적 가족은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가? 자본에, 사적 영리에 근거하고 있다…이러한 상태가 진행되면 결국 프롤레타리아에게는 가족이 실제로 사라질 것이며….’
그러나, 부르주레타리아 가족은 ‘선언’ 속 부르주아 가족을 따라간다. 가장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가족의 부를 축적한다. 부의 대물림이 그 중 하나고, 자본가적 투기가 다른 하나다. 자녀 교육도 철저하게 자본에 의한다. 유학을 통한 특수 지위 획득이 하나고, 인맥을 통한 기득권 행사가 다른 하나다. 프롤레타리아의 붉은색 명패를 문 앞에 달고, 부르주아의 화려한 가구로 집안을 채운 가족이다. 무산(無産) 대중 배반이다.
‘공산당 선언’은 위대했다. 그 가치를 두고 1억 명이 죽어나갔다. 나라와 민족이 갈라서기도 했다. 이 시대에도 바뀐 건 없다. 1999년 BBC가 설문했다. ‘1천 년간 가장 위대한 사상가(greatest thinker)는 누구인가’ ‘선언’의 주창자 마르크스였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중간계급을 논하지 않았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만을 말했다. 갈라진 두 계급의 투쟁만을 설명했다. 다만, ‘선언’ 한 귀퉁이에 소름 돋는 예언이 있다. ‘(혁명이 진행되면) 역사적인 운동 전체를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데까지 높여진 부르주아지 사상가의 일부가 프롤레타리아트 편에 서게 된다’. ‘얼치기’ 프롤레타리아 출현에 대한 예언이었을까. 170년이 흐른 지금, 그 예언이 정확하게 맞아간다.
마르크스주의자 트로츠키가 비유했다. ‘천국이 있는 정확한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공산당 선언의 검증 역사가 그렇다. ‘공산주의의 정확한 모습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소련 공산당의 실패에도 많은 청년들이 ‘선언’을 떼어 놓지 않는 이유다.
이들 청년들에게 ‘부르주레타리아’는 배반의 계급이다. 노동자 계급의 숭고함을 팔아먹는 배반의 계급이다. 노동자 계급의 희망을 박탈하는 배반의 계급이다. 자본가 계급의 특권을 추구하는 배반의 계급이다. 자본가 계급의 풍요함을 쫓아가는 배반의 계급이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의 서문을 이렇게 열었다. ‘하나의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확신이었다.
프롤레타리아의 탈을 쓴 부르주아의 탐욕이 군림하는 이 시대, 그 서문에는 이제 다음과 같은 첨언이 더해져야 한다. ‘또 다른 유령이 지금 세상을 배회하고 있다. ‘부르주레타리아’라는 배반의 유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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