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하지만 소중한 영상 자료가 나왔다. 인민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장소는 파주시 두포리 학살 현장이다. 총 6분 11초 분량에 참상이 담겨 있다. 시신 상태 등으로 봐 학살 1주일 내로 추정된다. 살해된 시신들이 뒤엉켜 널브러져 있다. 시신 사이로 가족을 찾는 유족들이 보인다. 악취 때문인지 코를 막고 있다. 유일한 생존자를 인터뷰하는 모습도 담겼다. 향토연구가 김현국씨가 본보에 최초로 공개한 영상이다.
‘사건’은 1950년 10월 2일 발생했다. 서울 수복 직후 퇴각하던 인민군이 벌인 참극이다. 공무원과 청장년 등을 두포리 산 39번지에서 총살했다. 피살자는 모두 97명이다. 지금까지 전해진 ‘두포리 학살 사건’의 개요다. 당시 대부분 사건이 그렇듯 동영상은 없었다. 목격자와 유가족 증언만을 토대로 정리된 사건이다. 이 사건의 동영상이 이번에 공개된 것이다. 김씨가 호주국립전쟁기록보관소에서 발견해 어렵게 입증했다.
두포리 학살 사건은 역사 속 진행형이다. 반세기 넘도록 제대로 된 진상 조사가 없었다. 2008년이 돼서야 발굴이 이뤄졌다. 정부가 주도한 발굴이었다. 군용전화선에 묶여 집단 학살됐다는 진술이 있었다. 이를 증명하는 시신들이 발견됐다. 보다 정밀한 조사가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조사는 마무리됐다. 정확히 표현하면 중단됐다. 현장에 추모비를 세웠고, 재향군인회 등의 위령제로 넋을 기려 왔다.
두포리 학살은 수도권 지역의 대표적인 사건이다. 인천상륙작전 패퇴 이후 북한은 대대적 학살을 자행했다. 하기와라 료(萩原遼)가 쓴 ‘한국전쟁’에 그 진실이 담겨 있다. ‘반동에 대한 숙청’ 명령이 빨치산에 내려졌다. 처형 대상자 수까지 정했다. ‘고양 125명, 김포 60명, 강화 23명, 시흥 180명, 안성 500명’ 등이다. 두포리에서는 한날한시에 97명이 처형됐다. 당시 학살 만행이 얼마나 대규모였는지 알 수 있다.
그 역사적 학살 사건의 원혼이 영상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당연히 국가가 보듬어야 한다. 전쟁 참상을 밝히는 자료로 삼아야 한다. 유족들의 바람도 그렇다. ‘보상 같은 건 바라지 않는다. 실상이 세상에 제대로 알려졌으면 좋겠다(희생자 김윤배 딸 김금자씨).’ 김윤배씨는 대한청년단원이었다고 한다. 자유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청년이었다. 97명 희생자 대부분이 그랬다. 그들의 죽음을 기려야 하는 건 자유대한민국의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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