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행복해도 될까요?
[삶과 종교] 행복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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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교우의 자녀가 모 대학의 의과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예정보다 하루 일찍 발표한 소식을 서둘러 전하던 그분은 너무 행복하다면서, 자기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지 조심스럽게 묻기도 하였다. 2020학년도 대학입학 수능을 치른 49만 552명의 응시생 중에서 135명인 0.026%만 뽑히는 곳이어서 더 그러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그 소식을 듣고 하루가 지나서 스카이라고 불리는 나머지 학교의 합격 소식까지 전해왔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더 클지 짐작하고 남겠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이것은 굳이 법률에 명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하늘이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로크(John Locke)와 루소(Jean Jaques Rousseau) 같은 서양의 사상가들은 이것을 ‘천부인권’(天賦人權)이라고 표현했다.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사람에게 하늘로부터 주어진 특권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은 얼마나 될까? 그것도 조작된 행복이 아니라 자기의 수고와 노력의 결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은 과연 얼마나 될까? 최소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 물론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만약 그렇게 얻어지는 행복이라면 얼마든지 그 기쁨을 누리며 나누어도 되지 않을까?

예수님은 여덟 가지 종류의 행복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누릴 행복, 애통하는 사람이 누릴 행복, 온유한 사람이 누릴 행복, 의로운 사람이 누릴 행복,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누릴 행복,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누릴 행복, 평화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이 누릴 행복이다(마태복음 5:3-9). 사도 바울은 여기에 한 가지 행복을 더 덧붙였다.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누릴 행복이다(사도행전 20:36). 행복이라고 다 같은 행복이 아니라는 말이다. 행복을 누릴 때는 반드시 적합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그리고 이것은 사는 형편이 넉넉하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누리는 행복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1인당 국민소득 3천 달러에 불과한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부탄의 국민이 누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행복지수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인생이 성적순이 아니듯이 행복도 성적순은 아니겠지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수고하고 노력했다면 거기에 어울리는 행복을 얼마든지 누려도 되지 않을까?

자선냄비 종소리와 함께 시작된 2019년의 12월이 저물어가고 있다. 일 년 내내 경제가 불황이라고 내몰아대던 성숙하지 못한 정치적 권모술수,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무조건 종북 빨갱이, 원조 빨갱이로 몰아대는 이합집산(離合集散)의 이기적인 혼란 중에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의젓이 제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한 대부분의 국민이 있었기에 다음해를 기대할 수 있게 되어서 행복하다. 그리고 2019년 남은 날들도 행복할 수 있도록 일분일초를 아끼며 최선을 다해야겠다. 바빠서 살피지 못한 가족도 살피고, 여유 없어 돌아보지 못한 이웃도 돌아보고, 시간 없어 만나지 못했던 친구도 만나서 사랑한다 고백하고, 수고했다 격려하고, 보고 싶었다 손잡아 안아주고 격려하고 다독거리며 후회하지 않을 최선의 행복을 누려야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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