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가라. 잘 있그라. 철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된 고 박종철 열사 33주기를 맞아 박 열사의 아버지 고 박정기 씨(1929~2018)가 아들의 사망 이후 20년 동안 직접 손으로 쓴 일기장의 일부가 공개됐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지선, 이하 사업회)는 박 열사의 아버지 고 박정기 씨가 아들의 1주기를 맞은 시점에서 직접 작성한 추도사 등이 담긴 일기장 일부를 공개했다고 13일 밝혔다.
사업회는 1987년 12월부터 2006년 8월까지 20년(6천810일)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장은 박 열사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숨진 1987년 12월 20일부터 2006년 8월 11일까지 박정기 씨가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자필로 기록한 것으로 6월 민주항쟁 이후 20년의 역사를 박 씨의 눈을 통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밝혔다.
또 2018년 박 씨가 노환으로 별세한 뒤 1주년이 되는 지난해 7월부터 해당 일기장과 자서전 준비를 위해 쓴 회고담 1권 등 14권을 유족으로부터 전달받아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와 함께 음표기 작업을 통한 문서화 작업을 진행해 왔다.
특히, 이번에 공개된 부분은 1988년 박종철 열사 1주기 당시 부산대에서 진행한 추모제를 위해 박정기 씨가 직접 작성한 추도사로 추모제는 기일인 1월 14일에 가장 가까운 주말인 1988년 1월 17일 일요일에 열렸지만 해당 추도사는 기일인 1월 14일 새벽 5시에 완성한 후 나중에 일기장에 옮겨 쓴 것으로 기록돼 있다.
아들의 첫번째 기일, 밤을 새워 아들을 그리며 눈물 속에 추도사를 썼을 아버지 모습이 절절하게 다가오는 추도사의 마지막 대목은 ‘어머니 누나는 서울 형님 형수 집에 있고 아버지 혼자 한없는 감홰 톳보기(안경) 속으로 눈물을 딱고 딱겄으나 그대로 지면이 다 저?구나. 잘가라. 잘 있그라. 철아…’라고 적혀있다.
박정기 씨는 아들의 죽음 이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에 참여하는 등 못 다 이룬 아들의 뜻을 대신 이루기 위해 민주화운동에 헌신했으며 1987년부터 2018년까지 30여 년을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민주화운동사의 주요 현장을 지켰다.
박정기 씨는 추도사에서 “한겨울 날씨도 추운대 이처럼 많은 학생 민주시민, 그리고 민가협 여러분게서 참석하셔 주신대 대단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마련해주신 학교당국과 준비에 협력해주신 여러분게 다 같이 감사드립니다. 고생 덜해 봤구나 하는 심정이였습니다. 이 자리 모인 많은 분 종철이 같은 자제를 둔 여러분 또 자가에서나 외지에서 학교에서 공부하고 노동현장에서 활동하는 여러분, 다 우리 함게 생각해봅시다…역사는 차곡차곡 쌓이고 정리된다. 좋은 것, 못된 것, 잘한 일, 못한 일들이 쌓이고 쌓이고 있구나. 지금 아버지가 너무나도 원망스럽구나.…철아, 이제 세상도 많이 바뀌어가지만 아직 너가 활동하는 형틀은 까마득하구나. 그러나 이제는 우리 국민이 자신이 선 것 같아(생긴 것) 같다. 지금도 차듸찬 간방에서 동지들이 무서운 용기로 투쟁을 하고 있구나 그리고 사람 사는 새상 만들어다오, 라고 왜치면서 죽어간 친구, 선배, 후배, 형들에게 이 아버지 말 전해다오. 모두들 걱정 말라고. 우리 아버지까지 민주운동 자신 있다고 하는데 걱정 말라고. 그 영혼들에게 열심이 달래다오. 너는 친구 사귀는 데는 일가견 있잖아. 앞장서서 그런 일 잘하지 않은냐.“
2018년 박정기 선생의 별세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청천벽력 같은 아들의 비보를 듣는 순간부터 아버님은 아들을 대신해, 때로는 아들 이상으로 민주주의자로 사셨다”며 “박종철은 민주주의의 영원한 불꽃으로 기억될 것이고, 아버님 또한 깊은 족적을 남기셨다”고 특별한 감회를 나타내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또 지난 2019년 6ㆍ10 민주항쟁 32주년 기념사에서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 평생 아들의 한을 풀기 위해 애쓰다 돌아가신 박정기 아버님께 달라진 대공분실을 꼭 보여드리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군사독재 시절 인권유린의 상징으로 박종철 열사가 죽음을 맞기도 한 남영동 대공분실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운영돼 오다 지난 2018년 12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건립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 진행된 설계공모를 통해 최종 당선작이 선정된 민주인권기념관은 옛 남영동 대공분실 터에 6천660㎡ 규모로 조성될 예정이며 빠르면 올해 말 착공해 2022년 하반기에 개관할 예정이다.
사업회 지선 이사장은 “박정기 선생은 아들의 죽음을 조국 민주화의 큰 공의로 돌리고 자신의 남은 삶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아낌없이 바친 분”이라며 “이번에 공개된 일기장이 남영동 대공분실에 세워질 예정인 민주인권기념관 건립에 있어 소중한 사료로 사용되길 기대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사업회는 민주화운동의 소중한 경험이 담긴 기록과 기억을 수집 정리 보전하기 위해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사료관과 함께 디지털 아카이브 사이트인 ‘오픈아카이브’를 운영하고 있다.
오픈아카이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52만 여종의 기록과 기록 사진, 영상 자료 등 민주화운동에 관련된 다양한 사료를 검색할수 있는 사이트로 누구나 이용가능하다.
의왕=임진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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