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강원도 감자골의 단상(斷想)
[기고] 강원도 감자골의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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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향한 초동 친구가 농촌생활을 즐기고 동화처럼 살며 정성들여 농사한 수수며, 사과, 서리태 검정콩을 보내줘, 받을 때마다 유년시절 지워지지 않는 영화 같은 추억이 나를 늘 혼란스럽게 한다. 지금은 추억이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충격적인 일이었고 사건 사고에 가까웠다. 내 나이 15살되던 중2 겨울방학 때의 일이었다.

사춘기 꿈 많고 호기심 가득한 우리들은 그 날도 친구집에 모여 한바탕 수다와 웃음 삼매경 후 화투치는 재미에 정신들이 없었다. 처음엔 민화투로 시작해서 나이롱 뽕, 섯다, 고스톱으로 정도를 높여 나가며, 팔뚝 맞기로 시작해서 꿀밤 때리기, 그러다 급기야는 어른들을 따라서 돈내기를 하게 되었다. 문제는 용돈을 따로 받지 못하던 우리로선 현금을 갖고 있을 리 만무해 각자 재주껏 현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돈을 챙겨 와야 함께 어울릴 수 있으니 수단과 방법은 다양하고 지능적이다 못해 범죄 수준이었다.

영자는 엄마가 계란을 수거하기 전에 먼저 닭장에 침입해 돈을 마련했고, 혜영이는 어른들 시장 볼 돈을 일부 쓸쩍해서 왔고, 나는 돈이 생기면 꼬박꼬박 모아 놓는 착한 동생을 구슬리고 달래다 안 되면 반 겁박을 주고 그러다 마지막엔 두 배로 갚아준다는 조건을 붙여 준비했고, 꾀꼬리 목소리를 갖은 정순이는 여러 친척들 앞에서 앙증맞은 엉덩이를 두들기며 ‘처녀 뱃사공’을 구성지게 불러 어른들에게서 출연료로 마련하여 도박을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마도로스가 꿈인 창수와 소시지를 실컷 먹는 것이 소원이라 미군에게 시집을 가겠다는 춘자가 싸움을 벌여 코피가 터지고 난리가 나는 바람에 엄하신 아버지가 아시고 쫓아오셔 한참의 야단과 훈시 끝에 각자 집에 가서 공부하라는 지시를 하시고 가셨다. 아버지는 우리를 잘 믿어주시는 편이라 우리들 스스로 성찰할 거라 기대하신 것 같았지만 사춘기 우리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각자의 야단맞는 모습들, 충고 듣던 자세 등을 흉내 내며 자정이 넘는 줄도 모르고 웃고 떠들고 있자니 문 밖에서 아버지의 두 번째 호통소리가 났다. 한겨울 어둡고 먼 길을 다시 쫓아오신 거였다.

우리는 잘못했다는 말도 못하고 목도리, 외투, 장갑은 챙기지도 못한 채 혼비백산하여 한적한 곳을 향해 한참을 뛰다보니 눈 앞에 교회가 보여 무조건 들어가 새벽기도 나오신 교인들 틈에 앉아 처음으로 찬송가를 진지하게 따라 부르며 가슴 절절하게 기도하였다. 기도 덕인지 아버지가 우리를 어묵집으로 데려가 따뜻한 어묵과 떡볶이를 사주시며 “친구란 서로를 배려하고, 대화하고, 의지할 수 있고, 서로를 이해하면서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며 즐거운 만남을 지속하는 소중한 관계니 싸우거나 다투면 안된다”라는 가슴 따뜻한 당부 말씀으로 벌을 대신하셨다.

그 친구들은 중학교 교감, 대학교수, 어린이집 원장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명성을 쌓으며 훌륭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날을 생각해보면 순도 높은 웃음이 절로 나온다. 또 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면 코끝이 찡하고 가슴이 멍해짐을 느낀다. 아버지는 우리들의 훌륭한 스승님이셨고 나에겐 자부심과 자신감을 갖게 해주신 세상에서 가장 인자하신 아버지셨다. 아버지 너무 보고 싶습니다.

김순희 아주대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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