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기독교가 오늘날 젠더 이데올로기에 민감한 이유
[삶과 종교] 기독교가 오늘날 젠더 이데올로기에 민감한 이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1세기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라고 부른다. 현대후기사회는 모든 것을 해체하는 주의(ism)와 중심적인 사고에서 탈피하고 다원화 되는 특징성향을 강력하게 갖고 있다. 기존의 모든 것을 다시 정의하고자 하는 성향 속에서 모든 가치관들은 큰 혼란을 겪고 있기도 하다. 20세기를 ‘전쟁의 세기’로 정의하고 온 인류는 평화를 기원했지만, 그 기대가 깨지는 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데올로기의 냉전체제로 인류를 떨게 했던 마르크시즘(Marxism)과학적 사회주의는 인류와 이별을 고하는 듯하였으나 오히려 오늘날 새로운 가면을 쓰고 인류의 역사에 더 큰 위협을 가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속 인류의 삶 속에 가장 두려운 화두는 ‘생로병사’가 되었다. 무병장수 인류의 희망은 유전자 조작을 통한 최첨단 기술의 개발과 발을 맞추어 인체의 신체를 조작함으로 ‘불로장생(不老長生)’이라는 21세기 진시황제의 시도로 표출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기업이 구글(Google)이며 미래학자들임을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류의 영성은 의미 없는 하나의 정신적 사조로 버려지는 것이다. 이 시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각 종교 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는 않은 문제일 것이다.

기독교는 왜 젠더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예민한 것일까? 그것은 영적인 문제로 답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 문제에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역사학교수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사피엔스>, <호모데우스>라는 책을 통해 사람이 신이 되고자 하는 논리를 이미 전개했다. 문제는 이 젠더의 문제가 결국 급진적 페미니즘의 성(性)적인 문제로 연결되고 그 연결고리는 버틀러의 책 <젠더 크러블>에서 “섹스가 젠더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젠더가 섹스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고백은 기독교 신앙고백의 질서를 다 무너뜨리는 말과도 같다. 기독교가 동성연애를 금하는 것은 동성 간의 성교의 방법적 행위의 문제와 더불어 창조적인 하나님 신앙을 강조해온 창조신앙의 중심을 쾌락으로만 퇴보시켜서 자녀를 출산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저들의 문제는 가정의 파괴를 가져온다. 결국, 결혼의 대상이 영혼 없는 짐승과 결혼이 되고 그리고 쾌락의 문제가 가정의 개념을 삼켜 버리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동성연애자들의 비판을 위한 푸념이 아니다. 이 화두는 한 사회를 지나 인류의 문제로 등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가정은 이 땅에서 천국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모델이 되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공식적인 기관 두 곳을 만드셨는데 그것이 ‘가정과 교회’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영혼의 쉼이 있는 곳, 그리고 공감과 나눔이 있으며 헌신적 이타적 사랑이 있는 곳, 그리고 자녀가 창조적으로 만들어지는 새 창조의 공간이 있는 곳이 바로 성경적인 가정이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그 어느 기관에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하나님의 가정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독교 국가들이 가정을 소홀히 여겨온 실수가 오늘날 이런 영혼의 가치가 물질에 흡수되는 시대를 만들었으며 국가가 가정을 대체하려는 공동(共同)의 잘못된 개념이 결국 창조주의 완전한 가정에 대한 계획을 망가뜨려 버린 것이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 속에서 아름다운 가정이 만들어지고 그리고 그 가정의 울타리 속에서 자녀가 생명을 얻는 그 근본적인 가정이 우리 안에 만들어져야 한다. 그 가정이 바로 창조의 질서를 만드신 하나님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할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대한민국을 꿈꾸어 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 이슬람 선교학교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