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아침] 무위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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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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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자연은 서로 공존하며 사는 하나의 공동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이 인간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행동이라고 착각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자연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지배하는 종족의 서열 최상위에 서 있게 되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식물들을 인간의 먹잇감이나 놀잇감으로 만들기 위해 유전자 조작까지 하며 자연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과 동식물의 훼손으로 기후변화, 생태계 혼란 등으로 인해 자연의 지배자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언제 지배자에서 처참하게 몰락하여 이 지구 상에서 멸종할지도 모르는 위태로움에 직면할 수도 있다.

지금 겪는 코로나바이러스는 서막일 뿐이라고 양심 있는 과학자들은 예견하고 있다. 어떤 것이 진리인지 자연에서 배우고자 하는 이들은 몇 안 되고, 오직 부와 쾌락과 권력에 치우쳐 인간의 본성을 잃어만 가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살다 보니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꾸미고 남을 속이고 이용하며 자연을 훼손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끝없는 탐욕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인간성 회복은 요원하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과거 현인들은 무위자연이라는 삶의 철학에서 세상과 모든 생명체 속에서 공존하는 지혜를 찾고자 하였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거나 가면을 쓰고 위선적인 행동을 할 필요도 없고, 자연과 더불어 있는 그대로, 그냥 사는 것이 진정한 삶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의 도는 인위적으로 꾸미거나 억지로 가공하지 않고, 자연의 성질이나 모습을 지키는 것 또는 방법이 ‘무위자연의 도’이다. 그래서 노자는 “성인은 만물이 스스로 본성에 순응하려 함을 도와줄 뿐, 의도적으로 행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무위자연의 도를 실현하는 방법으로는 외적으로 다투지 않고, 내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탐내지 않음을 실천하여야 한다고 한다. 즉 원래대로의 모습 그대로를 무위자연이라 했다. 그리고 불교에서 무위자연의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 먼저 불교 무위법(無爲法)의 정의를 찾아보자, 무위는 범어 산스끄리따(ASASKta)에 부정관사 ‘a­’가 첨부된 것이다. 산스끄리따는 불교 이전의 브라만교에서 절대신 브라흐만(창조신)에 의해 세상이 만들어지고 인간과 동물이 모두 완벽히 조종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래서 브라흐만이 만들어 인간에게 전했다는 언어인 산스끄리뜨(saskta) 즉 범어도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즉 절대 신에 의한 완벽한 조종이 되지 않는 상태를 가리켜 어산스끄리따 무위(無爲)라 일컬은 것이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의 무위자연은 신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어떤 인연에 의해 조작되지 않은 것으로,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항상 그대로 변함이 없는 해탈법을 뜻한다.

인간의 괴로움도 자연을 그대로 보지 않는 데서부터 오는 것이다. 바이러스의 침입도 기후 위기도 핵전쟁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모든 것이 시작부터의 원래대로 본래 모습을 자연에서부터 찾는대서 온다고 보는 것이다. 옛 고승들은 스님의 말씀만 법문이 아니고 자연의 모든 소리를 법문이라 하여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고 하였다. 이제 자연의 소리에서 진리를 찾는 지혜를 가져야 인간과 자연은 서로 공존하며 사는 하나의 공동체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선일스님 법명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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