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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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기술 활용 감시·통제
우리 사생활 철저히 침해 받아
규제 강화 등 기본권 보장해야

“인쇄술의 발명으로 여론 조작이 쉬워졌고 영화와 라디오는 이것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텔레비전이 발전하고 기계가 송수신을 동시에 가능케 해줌에 따라 사생활은 끝났다.”

소설 ‘1984’의 저자인 조지 오웰은 소설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정보통신기술이 나날이 발전했다. 그리고 발전에 발맞춰 계속해서 벌어지는 정보의 격차는 지식 격차, 권력 격차를 일으켰다.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감시와 통제는 권력관계를 만들어냈고 우리의 사생활은 철저히 침해받았다. 결국 정보사회는 감시사회가 됐고 우리 시대의 파놉티콘(panopticon)이 형성됐다.

파놉티콘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의미하는 ‘pan’과 ‘보다’를 의미하는 ‘opticon’을 합성해 만든 단어다. 흔히 ‘원형 감옥’ 또는 ‘일망 감시시설’이라고도 불린다. 중앙의 감시탑을 중심으로 수감자들의 독방을 원형으로 둘러싸듯 배치해 최소한의 비용과 관리만을 취하도록 감시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구조다. 감시자들이 교도소의 중심에 위치해 외곽에 둘러싸여 있는 죄수들을 감시하지만 죄수들은 결코 자신의 감시 여부를 알 수 없다. ‘역광선’의 효과로 인해 중앙의 탑에 있을 감시자의 존재 여부를 판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교도소의 형태인 파놉티콘 개념을 단순 건축 구조에서 철학의 한 개념으로 확장했다. 그리고 자신이 확장한 파놉티콘의 개념을 통해 권력과 인식(지식)의 상관관계를 규명했다. 먼저 그는 권력을 ‘사회적 관계 속에 분산돼 있는 것’으로 재정의했다. ‘소유’되는 권력이라는 기존의 관점에서 탈피해 ‘행사’되는 권력이라는 관점을 피력한 것이다. 그리고 그 권력은 지식을 통해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즉, 권력과 인식(지식)은 서로의 존재 이유(정당화하는 순환적 관계)가 됐고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상관관계가 더욱 깊어졌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의 한계를 극복한 ‘우리 시대의 유토피아’는 과연 어떠한 모습일까? ‘감시와 통제의 사회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안타깝게도 19세기의 러다이트운동을 반복함으로써 이 유토피아를 달성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현존하는 정보기술과 그 기술을 통한 혁신ㆍ성장ㆍ발전 등 우리 사회의 성취를 파괴하고 없앨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유토피아를 이룩할 수 있을까.

먼저 감시의 헌법상 한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 현재의 규제를 강화하고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통신 등 사생활 보호에 대한 기본권을 더욱 강력히 보장해야 한다. 두 번째로 강화된 기본권 침해 기준에 의해 침해 가부의 여부를 결정하는 별도의 심사기구를 마련해야 한다. 법원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한 기존 방침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국가기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국민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 시대 국가는 사회의 혼란과 불안을 통치에 이용한다. 스스로 만들어낸 불확실성을 ‘감시와 통제’를 통해 스스로 해소함으로써 국민 위에 군림한다. 그 과정에서 국민은 감시사회의 속박에 매인다. 따라서 국민 스스로 자신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흥신소로 전락한 국가기관에 대응하기 위해서, 정보공개청구제도, 공개질의, 헌법소원 등 헌법과 법률이 허락한 국민의 무기를 통해 대처해야 한다. 국민의 손으로 뽑은 국회의원을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하위 법령과 시행세칙을 제정하고 국민 스스로 인식을 바꿈으로써 ‘감시사회로서의 정보사회’라는 오명을 벗고 온전한 자유를 향유하며 삶을 지속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고양 국제고 배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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