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대한민국의 ‘독버섯’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대한민국의 ‘독버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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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침략에 호응 민족 팔아먹은 매국노들 해방 후 반공주의자로 변신 부귀영화 누려
자신의 행적 정당화 위해 왜곡·오염된 민족문화 양산… 이제부터라도 온전한 복원 절실
21세기에도 일제로부터 완전한 해방 미완… 철저한 친일파 청산이 진정한 ‘해방의 날’

■ 친일파는 어떤 의미인가

타율적인 개항으로 우리 근대사는 외세 침탈과 민족적인 수난으로 점철됐다. 결과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식민 지배라는 치욕스럽고 비극적인 망국의 역사를 맞았다. 가혹한 식민통치에 따른 인적·물적 피해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 후유증을 남겼다. 반만년 찬란한 역사가 왜곡되는 가운데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이나 자긍심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자기 비하’에 가까운 자괴심과 모멸감은 민족 장래에 대한 희망마저 깡그리 무너뜨렸다.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람들을 흔히 친일파라고 한다.

일제가 동아시아 각국을 침략할 무렵 이에 가담하여 저들의 정책을 지지하거나 추종한 세력이 바로 친일파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광복 이후 이들은 반민족행위자로서 비난의 대상이었다. 특히 일제가 침략하거나 전쟁을 일으킨 지역의 국가에서는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다. 흔히 부일파(附日派), 종일파(從日派), 종일주의자(從日主義者)라고도 한다.

친일파라는 용어는 시대에 따라 뜻이 약간 달랐다. 이는 대한제국 성립을 전후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친일파나 친일개화파는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을 개혁의 모델로 삼았던 정치 집단을 의미하였다. 을사늑약에 즈음하여 친일파는 일제 침략에 앞장서서 민족을 배반해 자신의 일신 영달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뜻으로 바뀌었다. 광복 이후 1948년에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서는 일본정부와 통모해 한일합병에 적극협력한 사람, 민족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와 시책 수행에 협력한 사람, 독립을 방해하는 활동을 행한 사람 등을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친일파는 현재 친미파나 친영파와 같은 순수한 의미가 아니라 민족의 안위에 피해를 끼친 사람들을 지칭하는 부정적인 역사적 용어로 정착됐다. 친일파의 기준이나 범위에 대한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다. 생존을 위해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인 협력을 한 사람도 이러한 범주에 포함할지 하는 문제가 쟁점 중 쟁점이다. 다만 이에 해당된 사람도 이후에 뚜렷한 항일투쟁이 행적이 확인되는 경우에 제외한다.

■ 친일파는 어떻게 분류하나

친일행위의 성격에 따라 친일파는 크게 지주·자본가, 지식인, 종교인, 언론인, 경찰·관료·군인 등으로 분류한다. 친일 지주·자본가들은 국방비·비행기헌납·금품헌납·총독열전각(總督列傳閣) 건축 등 친일행위에 앞장섰다. 한편 도·부·읍·면 의원이 되거나 친일단체 등에 가입·선동하는 경제적인 수탈에 적극 동조했다.

민족 지성을 대표하는 지식인들도 친일행위에 나섰다. 이들은 조선문예회·조선문인협회·조선임전보국단·국민총력조선연맹 등의 친일단체에 가입하여 각종 행사에 참가해 지원병·학병 지원을 선동했다. 강연·방송·좌담회·담화발표 등을 통해 내선일체·황도정신 고취, 총력체제의 생활화나 내핍을 강조했다. 시·소설·수필·논문 등의 친일작품을 썼다. 미술가 음악가 중에는 일제의 전시체제에 전쟁동원 분위기를 조성하는 그림이나 노래를 보급했다. 역사학자들은 식민사관에 입각해 한국사를 왜곡하는데 동참했다. 언론인과 교사 등도 일제 승리를 편파 보도하거나 알리는 등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지식인의 친일행위는 자기정체성 부정과 왜곡된 민족의식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식민통치의 말단 집행 요원인 경찰에 충원된 한국인들은 민족말살정책과 수탈정책을 직접 집행했다. 한국인에 대한 인적·물적 수탈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사상범 등의 검거·색출·투옥·고문을 자행했다. 직접적인 악행은 한국인 경찰에 의해 시행되어 민족 분열을 획책하는 결과로 귀결됐다.

관료층은 고등문관 출신의 고급관료와 면장·면서기 등 말단관료로 구분된다. 고등문관 출신의 관료는 군수·변호사·검사 등을 하면서 식민체제에 기생하는 존재로 고등경찰과 함께 친일파의 대표적 존재였다. 말단 면장·면서기와 동회직원들은 경찰과 협조해 식민통치의 인적·물적 수탈정책을 직접 도우거나 집행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또는 만주군관학교 출신들과 같은 자발적으로 일제에 복무한 장교들은 대표적인 친일파 군인이다. 물론 일본 군인이 된 사람 중 민족의식을 가지고 항일운동과 연계한 경우도 있었다.

■ 전쟁협력단체로 전시체제 ‘안전망’을 구축하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민간단체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정치적 성향이나 활동과 관계없이 조금이라도 민족적 색채를 지닌 단체는 내선일체를 구실로 해산시켰다. 이에 비례해 상당수 민간단체가 새롭게 조직됐다. 외형상 민간단체를 표방했으나 사실상 일제의 필요에 의한 조직된 전쟁협력단체였다. 대표적인 단체는 애국금차회·지원병후원회·대화숙·황도학회·조선임전보국단·국민동원총진회·대화동맹·국민동지회 등이다. 정세 변화에 따라 급조된 단체로 활용 가치가 떨어지면 곧 해산되거나 국민정신총동원연맹과 국민총력조선연맹에 흡수됐다.

조선임전보국단은 한국인 유력자를 최대한 동원해 도별로 발기인을 구성하여 결성했다. 목적은 “첫째로 아등은 황국신민으로서 황도정신을 선양하고 사상통일을 기한다. 둘째로 아등은 전시체제에 즉(卽)하고 국민생활의 쇄신을 기한다. 셋째로 아등은 근로보국의 정신에 기초하여 국민개로의 실을 거두기를 기한다. 넷째로 아등은 국가 우선의 정신에 기초해서 국채의 소화, 저축 이행, 물자 공출, 생산 확충에 매진하기를 기한다. 마직막으로 아등은 국방사상의 보급을 하는 동시에 유사시에 의용방위의 실을 거두기를 기한다.”는 등이었다.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한국인의 시국인식 강화와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전방위적인 선전활동에 지식인과 종교인 등을 동원했다. 가장 일반적으로 활용한 선전 수단은 바로 시국좌담회였다. 좌담회 주요 내용은 전쟁의 원인과 진행 과정, 동양에서 일제의 위치, 구미 각국의 상황 등이었다. 특히 친일 지식인들은 민족 차별에서 벗어나 진정한 제국 신민이 될 수 있다는 논리에 빠져들었다. 식민지인이 아니라 제국 신민으로서 당당한 지위를 누릴 수 있다는 인식이었다.

■ 일제 잔재 청산은 우리 내면을 성찰하는 기회다

34년 11개월 동안에 걸친 세계사상 유례를 보기 힘든 가혹한 식민지배통치로 우리는 막대한 경제적 수탈과 강제동원으로 물적·인적 피해를 입었다. 가시적인 피해보다 깊은 상처는 한민족 정신세계였다. 민족문화외 민족의식은 일제의 치밀한 계획 아래 말살·오염됐다. 물질적 피해는 복구하기는 쉽다. 반면 한번 훼손된 정신문화를 온전히 치유하는 데에는 지속적인 노력과 아울러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해방 75돌에 즈음해 우리가 일제 잔재 청산을 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건전한 정신문화 계승과 진전은 한류 열풍과 더불어 인류의 보편적인 실현하는 디딤돌로 다가오리라. 이제부터라도 모두 나서서 왜곡되고 오염된 민족문화의 온전한 복원에 동참하자.

■ 프랑스 사례를 거울로 삼자

우리 사회는 아직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잘못된 과거사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반면 나치지배를 받았던 유럽 각국은 부역자 처벌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프랑스, 벨기에,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은 독일 치하에서 벗어나자마자 나치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해국인 독일도 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 등을 통해 나치지도부를 숙청했다. 서독이 승전국 서방국의 대열에 성공적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 배경도 여기에서 찾아진다. 각국에 피해를 준 나치 전범을 철저히 처리해 후유증을 최소한으로 줄였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나치 협력자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들이 만든 썩은 종양이 결국에는 나라를 모두 부패시켜 프랑스를 망하게 만든다” 국가는 애국적 국민에게 상을 주고 민족을 배반한 범죄자에게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 프랑스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논리로 강력하게 주장했다. 프랑스는 국민과 정부에 의해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합법적인 처단이 행해졌다.

파리를 수복한 레지스탕스는 독일군이 물러간 뒤 이들을 재판하지 않고 처형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 개인적인 복수 등의 불합리한 면도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드골 정권이 들어선 이후 부역자들에 대한 즉결처분은 금지됐다. 당시 나치 협력자로 규정된 사람은 다음 3가지였다. △자유 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패배를 악용한 투항주의자들. △프랑스 국민을 악의 길로 잘못 인도한 비시정권의 고위 관료들과 추종자. △나치 독일의 승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력한 사람.

최고재판소와 숙청재판소에 체포돼 조사받은 사람은 99만명, 5만7천100여건, 7천여명에게 사형을 선고해 약 800명을 사형을 집행했다. 2천802명에게 유기징역형, 3천578명은 공민권을 박탈했다. 시민재판소에서 11만 5천건을 재판해 9만5천명이 부역죄를 선고받았고, 공직자 12만여명은 시민재판소에서 행정처분을 받았다.

불행하게도 친일파 청산은 역사적인 흐름과 정반대 방향으로 진행됐다. 독립운동가들이 청산했어야 할 친일파한테 도리어 내몰리는 비극적인 순간이었다. 해방 이후 친일파는 식민지 시대보다 더 호화스럽고 안락한 생활의 연속이라고 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반면 독립운동가나 후손 등은 가난한 삶 속에 생계를 이어가며 숨죽여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이들은 분단된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사회적인 영향력을 확대했다. 식민지배가 남긴 최악의 유산 가운데 하나이자 분단으로 인한 최대의 피해였다. 오죽하면 일제로부터 해방은 사실상 친일파를 위한 해방이라 하지 않던가?

김형목 사단법인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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