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코로나 시대’의 노총각·노처녀 결혼 주례

지난주 오랜만에 결혼 주례를 섰다. 신랑은 43세, 신부는 40세. 일반적 개념으로는 신랑·신부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많은 편이다. 두 사람은 10년 가까이 사랑을 했는데 이렇게 결혼이 늦어진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직장 문제. 여자는 학원 강사를 하고 있었지만, 남자는 오랫동안 소위 ‘공시생’(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노량진에 있는 고시촌에서 생활했고 시험을 볼 때마다 2점, 심지어 1점 차이로 낙방 되면서 다음에는 꼭 되겠지 하고 ‘열공’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 1점 차라는 것이 무슨 유령처럼 그의 눈앞에서 손짓한 것이다.

심지어 지방공무원 시험을 포기하고 경찰 시험으로 방향을 바꾸어 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1점차 낙방. 그래서 몇 년 허송세월했던 ‘공시생’ 꿈을 접고 지난해 해운회사에 시험을 봐 합격하여 직장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년에는 해외 지사에 파견하게 되어 이래저래 결혼을 늦게나마 서둘게 된 것.

둘째는 집 문제였는데 남자가 해외 근무로 나가게 되었으니 신부 집에서 당분간 신세를 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말하자면 남자가 해외근무를 나가게 된 것이 역설적으로 집 문제를 해결할 시간을 벌게 해 주었고 미루던 결혼식도 앞당겼다는 것이다. 아예 이번 해외근무 때 상황을 봐서 그 나라로 이민 가는 것도 고려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국내에서의 살인적 주택문제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벗어나 속 시원히 해외로 진출하여 새로운 인생의 지평을 열어 보는 것도 좋겠다는 것이다.

결혼에 앞서 이들 신랑 신부를 만나 대화를 나눴을 때 또 하나 새롭게 느낀 것은 신혼여행에 대한 것. 코로나 때문에 해외로 나가기 어렵지 않으냐고 했더니 꼭 해외로 가야 신혼의 의미가 있는 것이냐며 자기들은 ‘호캉스’를 선택했다고 했다. ‘호캉스’가 처음 듣는 말이라 어리둥절했더니 ‘호텔’과 ‘바캉스’를 합성한 말이 ‘호캉스’라며 조용한 지방 호텔에 가서 인생 설계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언제쯤 갖겠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너무 의외였다. ‘아이 갖는 게 지금으로서는 급한 게 아니며 삶의 터전을 잡는 게 최우선’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삶의 터전’을 잡으면 아들 딸 구별 없이 하나만 낳아 잘 키우겠다고 했다. 왜 우리나라 출산율이 감소하고 인구가 줄어드는지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째서 자식을 낳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닌지, 그리고 왜 하나만 낳아 기르겠다는 것인지 물었다. 그랬더니 자신들이 낳을 아기는 금수저도 아니고 흙수저를 물고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도 흙수저를 갖고 태어나 이렇게 힘들게 젊음을 보내고 있는데 자식까지 그 힘든 짐을 지우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말에 갑자기 내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결혼 자체가 인류창조의 질서이며 아기를 갖는 것 역시 창조 질서라고 이야기했지만, 이해의 벽을 뚫기는 현실의 벽이 너무 두꺼운 것 같았다.

드디어 결혼식 날이 왔다. 예식장 좌석은 거리두기로 배치돼 있었으며 하객들은 모두 마스크를 써달라는 안내 방송이 되풀이되어 나왔다. 주례까지도 마스크를 써야 했다. 주례석에서 내려다보는 하객들의 마스크 쓴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결혼 기념사진은 더 가관이었다. 마스크를 살짝 벗고 찍자고 통사정을 했지만 역시 통하지 않았다. 그러니 사진이 나온다 한들 누가 누구인지 식별하기도 어려운 기념사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코로나 시대의 결혼 풍속도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먼 훗날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스크 쓴 결혼사진을 보면서 코로나를 물리친 이야기를 한다면, 그 또한 가치가 있으리라.

변평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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