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인천] 큰 고을 인천에 봉황이 날아와
[함께하는 인천] 큰 고을 인천에 봉황이 날아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얼마 전 인천에 무척 기쁜 일이 있었다.

인천고등학교 야구부의「봉황기」전국 야구대회 우승.

그동안 여러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온 인천고 야구부지만 봉황기 대회 우승은 처음이라고 한다. 그런 만큼 선수들과 학교의 기쁨이 자못 컸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이번 우승 덕분에 ‘인천’이라는 이름이 모처럼 멋지게 전국에 휘날리게 됐다.

‘인천(仁川)’이라는 이름을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어진<仁> 내<川>’이다.

그래서 예전에「어진내」라는 이름의 출판물이 나온 적이 있고, 지금도 그렇게 써놓은 홍보물이나 안내문을 종종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인천은 ‘어진 내’가 아니라 ‘큰 고을’이라는 뜻이다.

‘인천’이라는 이름은 조선 태종 임금 때인 서기 1413년, 전국적으로 행정구역 이름을 새로 정할 때 처음 생겼다. 그 직전까지 인천은 ‘인주(仁州)’라 불리고 있었다.

이때 전국의 군현(郡縣) 이름 가운데 끝에 ‘주(州)’자를 쓴 곳은 대부분 ‘산(山)’이나 ‘천(川)’자로 글자를 고쳤다. ‘주(州)’자 대신 그 땅이 물에서 가까운 고을에는 ‘천(川)’자를, 산이 많은 고을에는 ‘산(山)’자를 붙여 바꾼 것이다. 인주는 바다를 끼고 있기 때문에 ‘인천’이 됐다.

결국 인천은 ‘인주(仁州)’ 때문에 생긴 이름인데, 여기서 ‘주(州)’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말한다. 그리고 인천의 ‘천(川)’은 이 ‘州’ 자의 뜻을 그대로 따르되 글자만 바꾼 것이니 ‘내(냇물)’가 아니라 ‘고을’이라는 뜻으로 보면 된다.

한편 ‘仁’은 오늘날 ‘어질 인’이라고 뜻과 소리를 단다. 그래서 인주도 흔히 ‘어진 고을’이라고 해석한다. 이곳에 살고 있던 인주 이씨(李氏) 집안이 고려시대 문종에서 인종 임금까지 7대에 걸쳐 임금(인종)의 외가이거나 왕비의 친정, 곧 ‘7대 어향(七代 御鄕)’이었기 때문에 ‘어진 고을’로 불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중세국어 때까지만 해도 ‘仁’은 ‘어질다’가 아니라 ‘크다’는 뜻으로 쓰였다. 조선 중종 때 언어학자 최세진이 지은 한자(漢字) 학습서 「훈몽자회(訓蒙字會)」에 ‘仁’을 ‘클 인’이라 풀어 놓은 것으로도 이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인주’는 ‘어진 고을’이 아니라 ‘큰 고을’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지금도 덕망(德望)이 있는 사람을 ‘큰사람’이라 부르듯, ‘인천’은 ‘(7대에 걸쳐 왕과 왕비가 나온, 덕망이 있는) 큰 고을’이라는 뜻이다. 그 큰 고을에 봉황이 날아들었다.

최재용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 사무처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