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만석공원 한켠에 고(故) 이병희 의원(1926~1997) 동상이 있다. ‘李秉禧 先生像’이라고 적힌 동상은 지난 2000년 뜻있는 수원시민들이 동상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기금을 모아 추진했다. 당시 홍기헌 수원방송 사장(전 수원시의회 의장), 우봉제 수원상공회의소 회장, 정기호 수원예술인총연합회 회장이 공동회장을 맡았다. 동상 앞에선 고인이 작고한 1월13일에 매년 조촐한 추도식이 열린다.
고 이병희 의원은 1963년 38세에 수원에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7선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그는 삭발을 해가며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려던 경기도청을 수원으로 유치했다. 삼성전자, 한일합섬, 연초제조창 등도 수원으로 유치해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역할을 했다. 성균관대 수원캠퍼스 유치에도 그의 역할이 컸고, 화성 성곽 복원에도 기여했다. 지금 수원이 경기도의 수부도시, 한반도의 중심도시로 자리매김하는데 이 의원의 역할을 빼고 얘기하기 어렵다.
수원이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광역도시로 성장하는 데는 몇 단계에 걸친 굴기(起)가 있었다. 첫번째는 정조대왕에 의해 ‘화성(華城)’이 축성되면서 조선 최초의 신계획도시로 급부상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일이다. 두번째는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 말까지 이어진 군사정권 집권기에 이뤄졌다. 5ㆍ16 군사정변은 18년에 걸친 군부통치로 민주화를 후퇴시켰으나 산업화의 급물결 속에 수원에도 큰 변화가 일었다. 이 의원이 경기도청과 삼성전자 수원 유치, 수원연초제조창 착공 등 정치적 역량을 발휘한 시기다. 세번째는 1990년대 이후 지방자치제가 부활되고 심재덕, 김용서, 염태영 민선시장의 선진화 시정에 힘입어 인구 130만여명의 대도시로 변모한 것이다.
2실(失) 1락(落) 7기(起)의 치열한 정치인생을 살았던 이병희 의원의 수원사랑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있다. 올해 이 의원 소천 23주기를 맞아 그의 애향 애민 업적을 기리며 ‘마당발 정치인 이병희’가 발간됐다. 이태섭 조웅호 노창호씨가 편찬위원회 공동회장을 맡아 시민의 머슴으로 수원시와 시민을 위해 진력했던 이 의원의 생애를 조명하는 책을 펴냈다. 4일 출판기념회를 연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이 의원의 공과(功過)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기도 하지만, 수원하면 여전히 이병희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이연섭 논설위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