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길 위의 도반들
[문화카페] 길 위의 도반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생 고생하다가 뒤늦게 척추전방전위증 진단을 받았고 최근에 탄천 천변을 걷고 있다. 한강으로 흘러가는 해질녘 물결을 바라보며 성찰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진부하게도 아파서야 자신과 세상을 이전과 달리 보는 자신이 씁쓸하다.

병자가 되면 남의 시선에 쓸데없이 예민해진다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나와 시선이 마주쳐도 나의 모습에서 시선을 곧 거두지 않는다.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런 시선들이 거듭되자 부담스럽고 불쾌해 비난의 심정에 젖는다. 그러다가 중얼거린다. 앞으로 나 같은 사람을 마주친다면 절대로 빤히 쳐다보지 않으리, 시선을 교환하였다면 즉각 시선을 스치리. 그러다가 또 중얼거린다. 아무래도 과부 사정 과부만 알고 홀아비 사정 홀아비만 알 뿐. 자신과 다른 행태를 보면 우선 당장 호기심에 자신도 모르게 쳐다보며 작은 연민과 미약한 공포를 느끼는 건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니겠나. 저들 중엔 지난날의 나도 있었고말고. 저들의 시선에 내가 불쾌해하는 건 아무래도 감정 낭비지. 뭐 그러면서 나는 한강으로 지체 없이 흘러가는 탄천의 물결에 제법 그윽한 시선을 준다. 물결이 내게서도 흐르고 마음이 서늘하게 씻기고, 삶의 여수(旅愁)가 일어나는 듯하였는데, 그러다가 나는 깨달았다. 그들의 무례하다고 할 수 있는 내게의 시선 지속은 그들의 일방 조사(照射)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렇게 끌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 그러니까 그들을 관찰하듯 빤히 쳐다보는 나의 시선이 그들의 그런 맞대응을 초래하였고, 그들의 그런 시선에 내가 불쾌해하자 그들도 불쾌해하지 않았나. 나는 그들의 시선이 대놓고 나를 깔보는 뻔뻔한 시선이라고 내심 분개하며 그들의 인격을 부정하였다. 고개를 숙이고 나는 내 시선과 표정을 애써 그려보았다. 상대와 시선이 마주치기 이전에는 몰라도 그 이후 나의 시선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적의의 시선으로 쉽게 바뀔 수 있거나 함축되어 있는 열등감 어린 방어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먼저 나를 주시하였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과정과 결과에서 내게 더 비중이 컸다고 하겠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타인과의 관계나 상황에 개입시켜 갈등을 일으키고 상황이 왜곡되자 상대의 탓으로 돌리며 분개하는 사례가 우리 범상한 일상에서도 그렇게 야기되지 않나 한다.

우리 사회의 연속되는 갈등에 건강치 못한 나도 우려한다. 이제 어느 편이 아니든 어느 편이든 모두 시리고 저리고 쑤셔 절룩거리는 다리와 같은 나라와 자신과 상대를 의식하고 있지 않을까. 최근 공수처 출범과 검찰 개혁은 사실 어느 편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타협을 배제하고 예리하게 나뉘어 자신의 상처로 상대를 노려보고 있다. 어느덧 연말. 세모의 기운은 해질녘의 기운. 우리는 여러모로 이 위중한 시대에 국운 전개를 위하여 지난하였던 현대사의 강물을 바라보며 자신을 성찰하고 새해에는 상대를 또 다른 나라고 여겼으면 한다. 이른 바 진영의 이해를 초월하여 시시비비를 따르고 소통하며 공화의 공동운명체로의 행보가 있기를 기원한다. 우리 모두 저마다 애국자가 아닌가. 아무래도 과분하기만한 산책을 하고 돌아와 졸시 한 편을 얻었다. “요것조것 헤아리며 쓸데없이 긴 글을 쓰고 고치다/허리와 다리 저려 두 달을 앓네/따르지 못할 주제/자신마저 잊고 몰두하다/허리와 다리 쑤셔 두 달을 신음하네/영하의 해질녘 대지에 말없이 눈 내리고/자업자득 그레고르 잠자는 듣네/겨우 고걸로 징징 치대는 소리 하지 말아요/일어나 똑 바로 걷고 걸으면 좋아질 겁니다/혈액암에서 자란 머리칼을 삭발하려고 이발소로 가는 후배의 호통/그 애증에 그레고르의 가슴에도 서늘한 흰 눈 내리네(「이발」)”

김승종 연성대 교수 ㆍ시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