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용의 더 클래식] 조국 폴란드를 마음에 품고 살았던 피아노의 시인 쇼팽
[정승용의 더 클래식] 조국 폴란드를 마음에 품고 살았던 피아노의 시인 쇼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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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을 ‘피아노의 시인’이라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쇼팽이 파리 사교계에 데뷔할 무렵, 파리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절정기였다. 그래서 당연히 로시니(Gioacchino Rossini)와 벨리니(Vincenzo Bellini) 같은 오페라 작곡가가 스타덤에 올라 있었다.

쇼팽 또한 오페라에 매료되기도 했다. 하지만 쇼팽은 유행에 따르지 않고 묵묵히 피아노 독주만 고집했다. 그가 피아노 한 대로 파리 사교계에 당당히 입성한 것처럼 말이다. 쇼팽이 남긴 작품 중 유난히 피아노 소품이 많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절정기가 있으면 쇠퇴기가 있는 법. 잘 알려진 것처럼 쇼팽은 한창 젊은 나이에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모차르트의 죽음이 그러했 듯, 쇼팽 역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모차르트와 비교되며 천재라 추앙받던 쇼팽의 삶 또한 그리 길지 않았다.

마요르카 섬에서 쇼팽과 상드는 사랑의 기쁨을 누렸지만, 결핵을 앓던 쇼팽의 병세는 점점 악화 되었다. 그래도 그는 그곳에서의 모든 걸 표현하려는 듯 여기서 많은 주옥같은 명곡을 썼다. 하지만, 화려한 사교 생활을 좋아하는 상드와, 너무도 내성적이고 고독에 침잠하는 쇼팽 사이에 갈등이 오기 시작한다.

마요르카에서 다시 파리로 돌아온 쇼팽과 상드는 9년간 이어온 사랑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고 만다.

상드와의 이별 후 쇼팽의 결핵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고 빈혈, 후두염 같은 갖가지 병마가 한꺼번에 그를 덮치고 있었다.

이런 병마와 싸우느라 작품은커녕 레슨도 못하게 된 쇼팽은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다 39세이던 1849년 10월, 자신의 심장을 조국 폴란드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스무 살에 떠나온 자신의 조국 폴란드를 언제나 마음 한편에 품고 살았던 쇼팽. 그래서 그는 화려한 파리에서도 언제나 외로웠고, 그런 정서는 결국 그의 음악에 묻어나는 듯하다.

마치 시인이 아름다운 언어로 시를 쓰듯 피아노로 표현할 수 있는 온갖 아름다움을 그려내려 애쓴 ‘피아노의 시인’.

몸과 영혼이 그의 음악에 사로잡혀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쇼팽이 그려내는 음악에 의해 달빛에 빛나는 마음속에서 꿈꾸는 듯한 마음이 된다. 그러나 과연 그는 피아노의 시인이었기만 했을까? 고국 폴란드 앞에서는, 고국 폴란드를 생각할 때 쇼팽은 열렬한 애국의 정으로 건반을 피로 물들이는 정렬의 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아름답고 고독한 음악은 ‘그리움’을 간직한 많은 이들의 마음에 눈물이 되었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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