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7-2. 주체적 민족정신 강조한 신채호와 영원한 반려자 박자혜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7-2. 주체적 민족정신 강조한 신채호와 영원한 반려자 박자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총독부 부속병원 조산원으로 근무, 줄 잇는 부상 환자에 민족의 울분 느껴...1919년 3월께 비밀리에 간우회원 규합
日 감시 속 떠난 중국에서 신채호와 인연, 서울에 산파소 개원했지만 경영난 시달려...노점상하면서도 밀입국한 독립운동가 지원
1928년 동아일보에 실린 박자혜 여사와 그녀가 운영했던 산파소 모습. ‘三旬九食’으로 3모자가 겨우 연명한다’는 사연을 담았다.
1928년 동아일보에 실린 박자혜 여사와 그녀가 운영했던 산파소 모습. ‘三旬九食’으로 3모자가 겨우 연명한다’는 사연을 담았다.

단재 신채호의 반려자인 박자혜는 1895년 12월11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수유동)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다. 일찍이 어머니가 사망해 어린 나이에 궁궐의 견습나인(일명 아기나인)으로 입궁, 10여 년 동안 궁중생활을 했다. 궁궐 생활을 위해 예의범절과 더불어 전통적인 학문을 받을 수 있었다. 일제 강점으로 대한제국이 망하면서 궁궐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상궁 조하서의 도움으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에 입학ㆍ졸업할 수 있었다. 이 학교는 엄귀비가 사족의 자녀를 교육하기 위한 현모양처주의를 표방했다. 이어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간호부과를 입학ㆍ졸업해 조산부가 됐다.


■“언변 능하고 간호부 독립운동 주동한 자”…일제의 주목

박자혜가 조선총독부 부속병원의 조산원으로 근무하던 중이던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이필주 목사와 연락을 취하면서 이 병원 조산원과 간호원들로 조직된 간우회의 회원들과 함께 유인물을 배포했다. 병원에 부상 환자들이 줄을 잇자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과정에서 민족의 울분을 절감했다. 그는 3월10일께 비밀리에 간우회원들을 규합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이어 같은 병원 동료들과 김형익 등 한국인 의사를 규합하고 시내 국ㆍ공립 병원 직원들의 동조를 얻어 태업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러나 다행히도 병원장의 신병인도로 풀려나게 됐다. 일제의 감시보고서인 <사찰휘보>는 박자혜에 대해 “평소 과격한 언동을 하는 언변이 능한 자”, “조선총독부 의원 간호부를 대상으로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주동자”로 명시하며 주목하고 있었다.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하기 어렵게 되자 박자혜는 중국으로 떠났다.


■단재와 부부이자 동지로서 인연을 맺다

베이징에서 박자혜는 옌진대학(현 베이징대학 전신) 의예과에 입학했다. 1920년 봄에 15세 연상인 독립운동가 신채호를 만나 인연을 맺었다. 단재와 만남에 대해 훗날 다음과 회고했다. “검푸르던 북경의 하늘빛도 나날이 옅어져 가고 만화방초가 음산한 북국의 산과 들을 장식해주는 봄 4월이었습니다. 나는 연경대학에 재학 중이고 당신은 무슨 일로 상해에서 북경으로 오셨는지 모르나 어쨌든 나와 당신은 한평생을 같이하자는 약속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듬해 아들을 낳고 다시 1922년 둘째를 임신했으나 경제적 궁핍으로 아들과 함께 귀국했다. 임신한 아이는 태어나지 못했거나 유아기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박자혜는 서울 인사동에 ‘박자혜 산파’를 개원해 생계를 모색했다. 조산부는 교사나 은행원 등 여성전문적인 직업으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임산부들은 출산을 산파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이 매우 궁핍했다. 서울로 돌아와 산파소를 개업했으나 일제의 감시와 방해로 ‘개점휴업’인 상태였다. 수시로 찾아와 온갖 방해를 일삼았기 때문에 영업을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산파소 경영난에 대한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열 달이 가야 한 사람의 손님도 찾아오지 않아 산파소 간판을 달아 놓은 것이 도리어 남에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러니 아궁이에 불 때는 날이 한 달이면 사오일이라. (중략) 산파소 간판이 걸린 초가집 대문을 넘어 문턱에 들어서자 부엌도 마루도 없는 한 칸 방에 박자혜가 앉아있었다. 부인의 얼굴을 차마 바라보기 어려웠다.”

신채호, 박자혜 부부
신채호, 박자혜 부부

■노점상 하며 독립운동 지원…끝내 독립 못 보고 병사(病死)

그는 생계를 위한 풀장사나 참외장사 등 노점상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머니로서 자녀를 기르고, 동지로서 중국에 있는 단재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국내 지사들과 연락해 해외에서 밀입국한 후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을 돕기도 했다. 1924년 정의부가 결성됐을 무렵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정의부 요원이 국내로 파견되었을 때 보천교 북(北)방주 한규숙을 중개해줬다. 1926년 12월에는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을 안내하는 등 독립지사들의 연락과 편의를 제공했다. 나석주는 서울 지리에 어두워 박자혜의 안내로 성공할 수 있었다. 이듬해 신채호와 베이징에서 재회해 셋째 아들을 임신ㆍ출산했다.

1928년 신채호가 일경에게 체포되니 책과 옷 등을 구입해 보내주며 옥바라지를 했다. 때로는 뤼순 감옥에 있는 단재에게 하소연 섞인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정 할 수 없으면 고아원에 아이들을 보내라”는 답장만 있었을 뿐이다.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에도 절망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러다가 단재는 “<국조보감>과 서양역사책을 사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책값이 50원에 달하는 거금으로 여사는 안재홍에게 부탁했으나 사서 보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편지는 거의 오지 않았다. 1934년 <신가정> 기자는 ‘부군은 옥중에, 신산(辛酸)한 새해맞이, 신채호 부인 박자혜 여사 방문기’에서 당시 곤궁한 상황을 담담하게 밝혔다.

1936년 신채호가 옥사하고 나서 첫째 아들 신수범은 경성실업학교를 중퇴하고 해외로 떠났다. 둘째 아들 신두범은 1942년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박자혜 역시 유일한 희망인 조국의 독립도 보지 못한 채 평생의 회한을 뒤로하고 1943년 10월16일에 병고로 홀로 셋방에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경제적 자립을 위해 조산부가 된 박자혜는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 살림살이와 자녀 양육 외에 독립운동의 후방 지원, 일경의 끊임없는 감시와 폭력을 겪어야 했다. 정부는 박자혜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못다 이룬 꿈이 저승에서나마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당신이 남겨놓고 가신 비참한 잔뼈 몇 개를 집어넣은 궤짝을 부둥켜안고 마음 둘 곳 없어 하나이다. 작은 궤짝은 무서움도 괴로움도 모르고 싸늘한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은 뜻을 못 이루고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시더니 왜 이렇게 못난 주제로 내게 오셨습니까. 분하고 원통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의 원통한 고혼은 지금 이국의 광야에서 무엇을 부르짖으며 헤매나이까?” - ‘가신 임 단재의 영전에’ 중.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뒤 화장된 단재 유골은 부인과 장남 등에 의해 열차로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역에서 잠시 지인과 만난 뒤 곧바로 운구돼 고향인 귀래리에 암장됐다. 1941년에야 한용운과 오세창 등이 묘표비를 세웠고, 2008년 5월에 영당 뒤 현재의 위치에 묘역이 조성됐다. 지인 홍명희는 단재의 고혼도 외롭게 돌아와 고향에 깃들었지만 부인 박자혜의 삶과 죽음 역시 그러했다. 단재 묘소에는 부인의 위패만 묻혀 있을 뿐이다. 서울에서 쓸쓸히 병사한 뒤 화장돼 한강에 뿌려졌기 때문이다.


한편 과묵하고 대쪽 같은 단재도 박자혜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이른바 ‘부부 십계명’은 이러한 사실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제1계 : 남편 되는 이, 밖에서 불편했던 얼굴로 집안 식구를 대하지 마시오.
제2계 : 남편 되는 이, 무단으로 나가 자거나 밤늦게 돌아오지 마시오.
제3계 : 남편 되는 이, 자녀가 있는 곳에서 아내의 허물을 책하지 마시오.
제4계 : 남편 되는 이, 의복에 대해서 잔소리를 하지 마오.
제5계 : 남편 되는 이, 친구의 접대로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마오.
제6계 : 아내 되는 이, 남편의 부족한 일이 있으면 조용히 권고하고 결코 군소리 하지 마시오.
제7계 : 아내 되는 이, 물건이 핍박해도 소리 내기를 절도 있게 하시오.
제8계 : 아내 되는 이, 남편이 친구하고 이야기할 때 뒤에서 엿보지 마시오.
제9계 : 아내 되는 이, 함부로 남편에게 의복 구하기를 일삼지 마시오.
제10계 : 아내 되는 이, 항상 목소리를 크게 해 역하게 하지 마시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댓글 운영기준

경기일보 뉴스 댓글은 이용자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건전한 여론 형성과 원활한 이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사항은 삭제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경기일보 댓글 삭제 기준
  1. 기사 내용이나 주제와 무관한 글
  2. 특정 기관이나 상품을 광고·홍보하기 위한 글
  3. 불량한, 또는 저속한 언어를 사용한 글
  4. 타인에 대한 모욕, 비방, 비난 등이 포함된 글
  5. 읽는 이로 하여금 수치심, 공포감, 혐오감 등을 느끼게 하는 글
  6. 타인을 사칭하거나 아이디 도용, 차용 등 개인정보와 사생활을 침해한 글

위의 내용에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불법적인 내용이거나 공익에 반하는 경우, 작성자의 동의없이 선 삭제조치 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우리지역 추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