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71년의 그늘] 화염에 터전 잃은 월미도 원주민… “귀향 꿈 간절”

당시 포격으로 불타버린 고향땅은 현재 월미공원으로 탈바꿈
市, 매달 25만원 지원•위령비 제막하지만… 100여명 귀향 요원

인천상륙작전 5일 전인 1950년 9월10일 오전 미국 해병대항공단 제15항모전단 항공기들이 인천 중구 월미도의 북한 주둔군을 무력화하기 위해 집중 폭격을 가했다. 이 폭격은 월미도 동쪽의 건물과 민간인 거주지도 함께 휩쓸었다. 당시 원주민 100여명은 71년이 지난 오늘도 돌아갈 고향이 없다. 미국 국립공문서관(NA2)•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전갑생 연구원 제공
인천상륙작전 5일 전인 1950년 9월10일 오전 미국 해병대항공단 제15항모전단 항공기들이 인천 중구 월미도의 북한 주둔군을 무력화하기 위해 집중 폭격을 가했다. 이 폭격은 월미도 동쪽의 건물과 민간인 거주지도 함께 휩쓸었다. 당시 원주민 100여명은 71년이 지난 오늘도 돌아갈 고향이 없다. 미국 국립공문서관(NA2)•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전갑생 연구원 제공

지난 1950년 9월10일 오전 6시께 인천 중구 월미도. 지평선에 걸린 채 고개만 겨우 내놓은 해가 여기저기 불을 뿜어댄다. 착각도 잠시, 지평선을 순식간에 넘어선 정체 모를 화염이 해보다 빨리 천지를 검붉게 수놓기 시작한다.

“대관절 도대체 무슨 일이오.”

혼잣말을 툭 내뱉고 나니 다리가 사시나무 떨듯 후들거린다. 주변으로는 평소 인사를 주고받던 이웃들 모두 우왕좌왕 뛰어다니고 있다. 무섭다. 무작정 자리를 피하고 싶다. 바들바들 떨리는 온몸을 애써 부여잡고 솟구치는 화염을 등진 채 앞으로 앞으로 바다를 향해 달린다.

이상하다. 언제부터인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냄새가 코 안을 헤집는 동안에도 ‘펑펑’ 하는 낯선 소리만이 먹먹한 귀를 마구 때릴 뿐이다. 답답한 마음에 놀고 있던 손바닥으로 귀를 두드린다. 하지만 금세 후회할 짓이다. 두드리는 손바닥과 귀 사이로 이웃들의 비명과 고함, 그리고 어린아이의 울음이 서로 뒤섞이면서 이유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한참을 달린 것 같다. 빠져나간 바닷물을 따라 드러난 갯벌이 지친 다리를 붙잡는다. 하지만 뒷목은 여전히 뜨겁다. 그래도 뒤를 돌아볼 자신은 당장 없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고르고 또 고른다. 두려움을 이겨낼 호기심이 뒤늦게 피어오른다. 결국 또 후회할 짓을 하고야 만다.

눈앞으로 욕심 많은 화염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어제까지 삶의 터전으로 모든 것을 함께했던 동네를 송두리째 집어삼킨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넋을 놓을 수밖에 없다. 화염이 널리 내뻗은 열기는 어느새 흐르는 눈물조차 앗아간다. 머리 위로는 처음 보는 비행기가 아수라장으로 변한 동네를 쓰윽 훑어본 뒤 ‘쌩’ 하는 소리를 내며 지나가 버린다.

머릿속이 멍해질 때 즈음 갑자기 하늘에서 ‘두두두두’ 소리가 들려온다. 이 소리에 맞춰 알고 지내던 이웃들이 선 자리에서 그대로 고꾸라진다. 놀랄 새도 없다. 갯벌에 도착한 이들은 모두 자리에 바짝 누워 진흙을 온몸에 바른다. 찝찝한 기분 따위는 살기 위한 투쟁에서 뒷전으로 밀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귀를 쉴새 없이 때리던 소리가 점차 들리지 않는다. 지평선에서 마주했던 해는 연기와 합을 맞춘 검붉은 화염을 깔보며 중천까지 올라갔다. 진흙투성이인 얼굴 사이로 안도감에 또다시 눈물이 흐른다. 기억 속에 선명했던 동네와 월미도의 모습은 한나절 만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다.

이로부터 71년이 지났다. 화염을 여기저기 뿜으며 귀를 먹먹하게 만든 소리의 장본인이 반경 30m 이내를 불바다로 만드는 무기인 ‘네이팜탄’이라는 사실 정도는 이제 알고 있다. 이웃들을 힘없이 쓰러지게 만든 소리가 기관포에서 나왔다는 것도 안다. 심지어 이들 소리가 월미도 전역을 뒤흔든 게 한국전쟁의 판도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으로부터 5일 전의 일이라는 것, 월미도에 주둔한 북한 인민군을 무력화하기 위해 미군이 폭격했다는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지난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표한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 관련 보고서를 통해 이 모든 게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나 당시 포격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윤정여씨(93), 이범기씨(90), 전천봉씨(88) 등 월미도 원주민 100여명은 돌아갈 고향이 어디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이념과 사상에 가로막힌 곳도 아닌데, 71년 동안 세상은 월미도가 이들의 고향이 아니라고만 한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커지는 추석을 앞두고 인천상륙작전 71주년을 맞이한 2021년 9월15일조차 월미도 원주민이 꿈꾸는 귀향은 여전히 머나먼 길이다. 이들의 고향은 미군이 주둔하다 국방부에 넘겼고, 지금은 인천시가 사들여 월미공원으로 만든 뒤다. 국방부와 시가 나서지 않으면 이들의 귀향은 꿈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현재 시는 원주민들에게 매달 25만원씩 지원하고 다음달 5일께 희생을 기리는 위령비를 세울 뿐이다.

이씨는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날의 참혹함을 모두 지켜봤고 기억한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우리가 원하는 건 처음도 귀향이고, 중간에도 마찬가지고, 앞으로와 끝도 귀향뿐”이라며 월미도 원주민이 귀향할 수 있도록 국방부와 시의 적극적인 지원·협조를 호소했다.

한국전쟁 ‘희생양’ 월미도 원주민 눈물 닦아줘야

71년 전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벌어진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으로 귀향길을 잃어버린 월미도 원주민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월미도 원주민들의 슬픔과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서는 인천시가 적극적으로 나서 국방부와 국민권익위원회를 설득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4일 시 등에 따르면 1950년 9월10일 일어난 미군폭격에서 월미도 원주민들은 인천상륙작전의 성패를 가름할 핵심지역에서 살았다는 이유로 민간인 면제규범에 따른 보호를 받지 못했다. 또 이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로도 군사기지로 변한 월미도에 돌아가지 못한 채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야 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8년 발표한 관련 보고서는 이 같은 문제들을 지적하며 월미도 원주민의 귀향 지원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섬의 지정학적 위치로 민간인이 희생당했기 때문에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월미도 원주민들이 원하는 귀향과 관련한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71주년(9월15일)을 앞둔 이날까지 월미도 원주민의 귀향을 위한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월미도 원주민들이 삶의 터전이라고 주장한 땅은 이미 국방부가 1971년 보존등기한 뒤 시에 매각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특히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 조치에 대해서는 국방부와 시가 서로 책임만 떠넘기고 있다. 국방부는 땅을 정상적으로 시에 매각했다고 주장하며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관련 매매계약서에는 ‘매각재산을 명도한 후 발생하는 모든 사고에 대해 을(시)이 책임진다’라는 조항도 있다. 시는 2001년 사들인 땅에 월미공원을 조성하면서 월미도 원주민의 귀향을 위한 조치에 전혀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월미도 원주민과 유족 등으로 이뤄진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회는 이제라도 시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 이후의 토지소유권 문제라는 부분에서 유사한 강원도 펀치볼 마을의 사례는 대책위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펀치볼 마을은 2017년 9월 양구군의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원주민이 땅을 되돌려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한 사례다. 양구군은 우선 관련 자료를 모아가며 관계기관 등을 설득했고, 이를 통해 원주민들의 집단민원을 받은 권익위는 펀치볼 마을의 땅을 매각할 수 있도록 전부 국유화했다. 국유화한 펀치볼 마을의 땅에 대한 주민 매각은 곧 이뤄질 예정이다.

현재 대책위도 2007년 4월6일 권익위에 관련 진정을 넣은 상태다. 이에 따라 시가 펀치볼 마을 사례처럼 권익위를 적극적으로 설득해 월미도 원주미들에게 땅을 되돌려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대책위는 월미도 원주민들에게 아무 통보 없이 보존등기를 추진한 국방부에 대해서도 시가 나서 귀향 관련 지원책 등을 마련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 중이다. 한인덕 대책위원장은 “시에서 지원책이 늘어나는 걸 보면 우리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것만 같다”면서도 “귀향은 진척이 없다 보니 시가 적극적으로 나서 해결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이에 대해 시 관계자는 “땅을 사들일 당시에 관련 사안을 알고 있었지만, 문제가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어 “당장 땅을 반환하기는 힘들더라도, 관련한 여러 지원책을 찾도록 하겠다”고 했다.

김민기자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