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참 공직자의 길, 목민심서에 묻다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을 가장 존경하고 흠모하는 인물로 여기게 된 주요 텍스트를 꼽는다면 단연 『목민심서(牧民心書)』일 것이다. 이 책에는 지방관이 중앙정부로부터 파견되어 각 지방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지방관의 몸가짐과 업무처리지침, 적용사례를 수록하여 당시의 사회현실과 함께 정약용의 지방관에 대한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이는 현대사회 공직자의 윤리뿐만 아니라 직무 수행자로서의 마음가짐과 그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저술한 가장 대표적인 저서로 정법 3집, 즉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 『흠흠신서(欽欽新書)』를 들 수 있다. 강진 유배시절에 저술된 이 책들은 그의 경전에 대한 저술과 더불어 국가 체제 개혁과 당시 사회에 적용되어야 할 기본 지침서로 제시된 것들이었다. 이 중 정약용이 보고 듣고 체험하면서 얻은 깨달음과 그의 제자와 자제들이 함께 조사, 수집, 정리한 방대한 자료 등이 집대성된 『목민심서』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정신과 교훈을 적용할 수 있다.
먼저 ‘목민심서’라는 책 제목의 의미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정약용의 『목민심서』 ‘자서(自序)’에 나오는 ‘목민(牧民)’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순임금은 요 임금의 뒤를 이어 12목(牧)에게 물어 그들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문왕이 정사(政事)를 펼 때 사목(司牧)을 두어 목부(牧夫)라 하였으며, 맹자는 평륙(平陸)에 갔을 때 추목(芻牧)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는 것에 비유하였으니, ‘백성을 부양하는 것’을 가리켜 목(牧)이라 한 것은 성현이 남긴 뜻이다. 성현의 가르침에는 원래 두 가지 길이 있다. ‘사도(司徒)’는 만백성을 가르쳐 각기 수신(修身)케 하고, 태학(太學)에서는 왕족 및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자제를 가르쳐 각기 수신하고 치민(治民)케 하였으니, 치민하는 것이 목민하는 것이다. 따라서 군자의 학(學)은 수신이 그 반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인 것이다.
‘목민’은 ‘백성을 부양하는 것’으로 성현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다. 군자의 삶 중, 반에 해당하는 중대한 과제였다. 자신을 수양한 뒤 자신의 뜻을 백성을 부양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찾게 한 것이다. 당시 사회에서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관료의 길을 걸어야만 가능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지방관은 국왕의 전권을 위임받는 자로서 백성들과 직접 대면하는 위치에서 ‘목민’할 수 있었다. 이런 중대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 준비과정이 필요했고, 각각의 처리과정에서는 적절한 지침서가 필요했다. 이런 까닭으로 정약용이 목민서를 편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책에 ‘심서(心書)’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은 진실로 내 덕을 쌓기 위한 것이요, 어찌 꼭 목민에만 한정한 것이겠는가. ‘심서’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다. 때문에 ‘심서’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서 ‘목민’을 실행할 수 없기에 ‘심서’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다. 너무나도 실행하고픈 간절한 마음이 제목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목민심서』는 1818년 저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한 기초작업은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정약용은 일찍이 『치군오경(治郡要訣)』과 『정요(政要)』를 재분류하고 끝부분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종정요람(從政要覽)』을 편집한 일이 있었다. 1797년 정약용이 황해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재직하던 무렵일 것으로 추정된다. 직접 지방관을 지내면서 당시에 전해지던 목민서들을 재분류하며 기본지식을 익혔다. 이후 강진 유배 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체제를 잡은 뒤 저술하였다. 이 과정에는 유배 때 저술했던 많은 책과 마찬가지로 제자들과 자제들의 협력이 있었다. 자료수집, 사료발췌, 구술필사, 정서(正書) 및 제책(製冊) 등의 작업에 10여명의 조수가 동원되었다. 저서의 체제를 잡고 자료를 수집하는 데 매우 오랜 시일이 걸렸지만 저술은 짧은 기간에 마칠 수 있었다. 1817년 『경세유표』가 저술되었던 다음 해에 바로 『목민심서』가 저술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초고는 1821년에 『목민심서』 ‘자서(自序)’를 쓰기까지 퇴고작업이 있었고, 완성본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현존하는 『목민심서』에는 두 가지 이본(異本)이 있는데, 1817년 초고본과 1821년 완성본이 그것이다.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다산, 자서(自序)에서 조선의 현실 한탄
강진 유배시절 ‘지방 목민관의 매뉴얼’ 저술
치민(治民) 위한 몸가짐·업무처리지침 등 수록
현대사회에서도 그의 이상과 신념 빛나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목민서의 집대성이라고 말한다. 조선 후기에 여러 종류의 목민서들이 편찬되었고, 체제와 내용이 가장 잘 정비된 것이 『목민심서』였다. 이런 목민서가 처음 우리나라에 수입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에 중국에서부터였다. 조선에 들어와서 우리 목민서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은 명나라 주봉길(朱逢吉)의『목민심감(牧民心鑑)』과 송나라 진덕수(眞德秀)가 지은 『정경(政經)』이다. 우리의 실정에 맞게 이들이 수정 보완되었는데, 작자미상의 편지 형식, 초록 형태에서부터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저자가 밝혀진 단독 저술 형태의 목민서도 유통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안정복(安鼎福;1712~1791)의 『임관정요(臨官政要)』와 홍양호(洪良浩;1724~1802)의 『목민대방(牧民大方)』이다. 『임관정요』는 정어(政語), 정적(政蹟), 시조(時措)의 3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민대방』은 6전체제로 편찬되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이런 목민서들의 편찬과 유통을 기반을 현실에 맞는 지침, 지방관의 목민에 대한 이상, 모범적인 사례를 효율적으로 배치되었고, 그 속에 6전체제의 형식도 포함되었다.
『목민심서』는 12부(部) 72조(條)로 구성되어 있다. 12부는 부임(赴任),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 이·호·예·병·형·공의 6전(典), 진황(賑荒), 해관(解官)이고 각각 6조씩 나누어 설명하였다. 부임6조에서는 발령을 받고 현지에서 부임하기까지의 몸가짐과 사무절차에 대하서 서술하였다. 율기6조에서는 목민관의 자기 규율의 구체적인 방식을 자세히 기술하고 봉공6조와 애민6조에서는 지방 통치의 근본적 목적과 이상을 제시하였다. 특히 12부 가운데, 율기, 봉공, 애민, 이·호·예·병·형·공의 6典의 총 54조목이 수령 고과(考課) 항목으로 그대로 응용될 수 있도록 편목을 설계하였다. 이는 지방관의 임무와 그들이 한 일에 대한 평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보고 수령칠사(守令七事)를 대체하는 수령 임무와 고과 항목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정약용은 “수령은 옛날의 제후로서 주례(周禮)의 사도(司徒) 직책이 그의 직책이 아님이 없는데, 어찌 수령의 직책을 다만 7사에 한정시킬 것인가”라고 한 것처럼 『목민심서』에는 수령의 구체적인 임무와 고과항목을 분명히 배치하였다. 진황6조는 재난을 당한 비상사태에서 백성들을 어떻게 구제해야 할지 그 대책을 제시하였고, 해관6조에서는 목민관 교체에 항상 대비하여 치적과 혜택을 고을백성에게 남길 것을 당부하였다. 이처럼 『목민심서』는 지방 목민관의 매뉴얼이었던 만큼 당시 법의 테두리 내에서 얼마나 공정하고 정직하게 백성을 위하는 운영을 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정약용이 생각한 이상적인 수령상은 바로 사목(司牧), 양떼를 기르는 목자와 같은 목민관이었다. 즉 치민(治民)을 목민, 양민(養民), 교민(敎民)과 동일시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민을 돌보고 기르는 일’은 잘 먹이는 것이 그치지 않고, 각각의 ‘수신(修身)’으로 표현되는 백성들 각각의 도덕적 교화에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서(自序)」에 “성인의 시대가 이미 멀어졌고 그 말씀도 없어져서 그 도가 점점 어두워졌으니,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바는 알지 못한다.”라고 한 것처럼 현실은 다스리는 자가 백성들을 수탈하는 데 급급한 상황이었다.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쓴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런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격을 학문으로써 메워보고자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는 수령을 만백성을 주재하는 자, 만기를 총괄하는 자로서 옛날의 제후와 같은 자로 보았다. 실제로 조선시대 수령은 국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자였으며, 치자(治者)로서의 포부를 펼쳐볼 만한 자리였다. 따라서 제대로 된 통치를 위해서 『목민심서』를 저술했고, 그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목민관의 시각으로 펼쳐 놓았다. 『목민심서』의 내용 중에는 ‘안(案)…’ 의 형태로 자신의 견해를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余) 읍성에 있을 때 보니까…’, ‘내가 민간에 오래 있어 잘 아는데…’ 등으로 강진 유배 때의 경험, 곡산부사 및 어사 때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생각을 기술하였다. 또, 자신의 저술 속의 글을 직접 인용하기도 했다. 이 밖에 목민관이었던 부친의 임지에서 얻은 견문, 조선조의 여러 법전, 지방의 행정문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 및 문집 등 다양한 자료를 이용하였다.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통해 지방통치에 대한 구상을 자신의 경학과 경세학의 신념 및 그동안 집필해온 경세론과 정치적 경험을 집약적이고 체계적으로 풀어냈다.『목민심서』만큼 그의 학문세계, 개인적 경험이 종합되어 있는 저작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복잡해진 현대사회에 있어도 그의 이상과 신념은 빛이 바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져 온 등대같은 존재라 하겠다.
노혜경 덕성여자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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