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천진암을 찾았다. 입구에는 6월 24일에 ‘한국천주교회 창립기념제’가 열리는 사실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넓게 포장된 경사진 도로를 올라, 운동장처럼 깎아 놓은 넓은 터를 가로질러, 천진암 계곡에 접어들었다. 이 계곡은 230여년전과 같은 모습이리라. 천진암 터에는 젊은이들이 유학을 공부했다던 불교 건물은 사라지고 없다. 대신 천주교에서 기리는 다섯 분의 묘가 놓여 있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권철신, 권일신, 이벽, 이승훈, 정약종의 묘였다.
천진암 입구 쪽으로 나와 다른 갈래의 길로 1킬로 정도를 가니 가족묘가 있었다. 정약종의 조부인 정지해, 아버지 정재원, 형 정약전의 묘와 이벽의 아버지와 형제들의 묘가 모여 있었다. 다른 쪽엔 정하상과 유진길의 묘가 있었다.
천진암 계곡을 나와 성지 초입의 등산로를 따라 올라갔다. 곧 능선의 길로 접어들었다. 등산로 양쪽 경사가 급하고 빽빽한 숲이기 때문에 외길 등산로만을 따라가게 되었다. 가끔 계곡 쪽에 일부러 방향을 표시하여 “등산로 아님”이라는 경고를 했다.
평일 등산로는 좀 심심했다. 거의 앵자봉에 도착할 때까지 이렇다 할 전망이 없었다. 저 아래쪽 숲 속에 천진암 계곡이 있을 텐데. 소나무·잣나무 숲 사이로 보드라운 흙을 밟으며 오솔길을 걷노라니 사색하기 좋은 길이란 생각도 들었다. 가파르게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이 종종 나타났다. 밧줄을 설치해 놓았을 정도였다.
그런데 도중에 물 마실 데가 없었다. 내겐 페트병에 물이 약간 있었을 뿐이었다. 천진암 앞 바위틈에서 난 샘물을 받아놓은 것이었다. 뜨거운 날씨 탓인지 점심때 먹은 퇴촌 밀면 탓인지 갈증이 심했다. 남은 물로 아주 조금씩 입만 축이었다. 그러나 앵자봉까지 3분의 2쯤 올라갔을 때 물이 동났다. 안이한 산행을 자책했다. 다행히도 동행이 집에서 챙겨온 매실 물을 조그만 가방 속에서 꺼내 반을 덜어 주었다. 고마운 물, 아니 고마운 동행이었다.
앵자봉에 가서야 천진암 기슭을 대강 내려다볼 수 있었다. 멀리 깎아놓은 터가 보였다. 앵자봉의 앵(鶯)은 꾀꼬리란 뜻이다. 꾀꼬리가 알을 품은 산세라 하여 괴꼬리봉이라 부르다가 한자로 표기하면서 앵자봉이 되었다고 한다. 앵자봉에 안내판에 소개된 내용이다. 앵자봉은 667미터로 높은 산은 아니지만, 기슭이 깊었다. 내려다보는 기슭에 천진암 위치가 대강 감이 잡혔다.
천진암 계곡은 정약전·정약용 형제들이 놀러 오던 곳이기도 했다. 정약용은 고향 소내의 사계절 아름다운 곳을 노래한 시에 천진암의 가을 단풍구경을 들기도 했다. “화랑방 그 안에서 술을 사오고 /앵자봉 그늘에서 수레 멈추니, /하룻밤 부슬부슬 비 내린 뒤에 /두 기슭 단풍들어 붉은 숲이네.”
천진암은 또한 권철신에게 가르침을 받던 젊은이들이 강학을 위해 모이곤 했던 곳이었다. 권철신(權哲身, 1736~1831)의 호는 녹암(鹿庵)이다. 조선 초 인물인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후손이다.
권철신은 성호 이익과 그 문인들과 교류한 아버지 권암 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나중엔 성호 이익을 비롯하여 성호학파 문인을 찾아다니며 여러 선생에게 배웠다. 이미 노령인 성호는 재덕을 겸비한 권철신을 아끼고 사랑했다. 권철신은 양명학적인 경향을 드러냈고, 이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당시는 주자와 다른 해석은 드러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의 학문 경향은 도덕적 실천을 중요하게 여긴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정약용이 쓴 묘지명에 의하면, 모두 그의 효우(孝友)와 독행(篤行)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의 집안에 들면 화기(和氣)가 가득 차있어서 마치 향기가 사람을 엄습하는 것 같았고 난초 향기가 그윽한 방에 들어간 듯했다고 했다.
이처럼 권철신은 명망이 있어서 학문을 위해 그를 찾는 이가 많아졌다. 그리하여 권철신 집에서 가까운 주어사와 천진암에서는 그의 문도들이 해마다 겨울이면 강학모임을 갖곤 했다.
정약용의 둘째형인 정약전은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언젠가 겨울에 주어사에 임시로 머물면서 학문을 강습하였는데, 정약용은 그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녹암이 직접 규정을 정했는데, 새벽에 일어나서 냉수로 세수한 다음 숙야잠(夙夜箴)을 외고, 해 뜰 무렵에는 경재잠(敬齋箴)을 외고, 정오에는 사물잠(四勿箴)을 외고, 해질녘에는 서명(西銘)을 외게 하였는데, 장엄하고 경건하여 법도를 잃지 않았다.” 모두 유학 관련 서적이었다.
1779년 겨울에도 천진암에서 강학 모임이 있었다. 정약전·정약용 형제도 참석해 있었다. 눈 오는 밤에 이벽이 찾아오자 촛불을 밝혀두고 경(經)을 담론했다. 그 광경을 정약용은 훗날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간직했던 것이다.
찾아온 이벽(李蘗, 1754~1786)은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자가 덕조(德操)이고, 호가 광암(曠庵)이다. 그의 아버지 이부만(李溥萬)은 아들이 무관으로 출세하길 바랐지만, 그는 오히려 경서공부에 열중하였다. 당시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서양서적도 열심히 탐독했다. 이벽은 이가환·이승훈, 그리고 정약용 형제 등과 깊은 교유관계를 맺었다. 모두 성호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하는 기호남인계 젊은이들이었다.
한국 천주교는 이벽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혼자서 천주교를 공부하고 감화되었다. 1783년 겨울 이승훈이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되자, 이벽은 이승훈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긴다. 그에 따라 이승훈은 북경의 성당에 찾아가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이듬해 봄에 귀국했다. 이벽은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본격적으로 전도활동을 시작한 이벽은 권철신을 찾아갔다. ‘권철신은 모든 선비들이 우러러보는 명망 있는 분이니, 그분이 우리 교에 들어오면 다른 사람들도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벽은 권철신의 집에 10여 일을 묵었다 갔는데, 권철신은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그의 동생 권일신은 이벽을 열심히 따르게 되었다.
1785년, 명례방 김범우 집에서 이벽의 주재 아래 모임을 하다 적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이었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이 사건을 비교적 단순하게 처리했다. 그러나 그 여파는 간단치 않았다. 주위의 유생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동향을 불온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관련자의 집안에서는 놀라서 집안 단속에 들어갔다. 이벽은 아버지 이부만과 충돌했다. 사실상 연금 상태에 처해 있던 이벽은 전염병으로 죽고 마는데, 가족의 안위를 위해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선뜻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권철신은 후일 동생으로부터 천주교 서적을 구해서 읽고 암브로시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제 권철신과 그의 가족들은 천주교를 따르게 되었다. 그러던 중 교회 지도자로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동생 권일신이 1791년 신해박해 때 고문당한 여파로 유배 길에서 세상을 떴다. 권철신은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집에 들어앉았다.
정약용은 훗날 그의 묘지명에서 말하고 있다. 권철신 본인의 죄는 언급함이 없이 그의 집안과 이웃의 죄를 권철신에게 덮어씌웠으니 제대로 법을 적용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정약용이 보기에는, 천주교는 구실이었을 뿐, 훌륭한 선비인 권철신이 정적들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기록과 연구는 권철신이 은밀하게 신앙 활동을 계속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들이 당했던 고초는 종교적 신념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고매한 인격과 학문적 열정 때문이기도 했다. 천진암 계곡에 있었던 젊은이들의 학문적 열정과 열띤 토론들, 의금부 국문장에서 있었던 종교에 대한 가혹한 추궁들과 답변들, 내심의 생각들에 대한 당사자들의 언표와 후세 사람들의 재단들 등등. 갑자기 답답한 느낌이 몰려왔다.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은 더욱 세상의 억압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억압적 세상은 자유로운 생각을 결코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영혼을 어찌 가둘 수 있겠는가.
앵자봉에서 내려올 때 비가 내렸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천진암 성지 초입으로 내려왔을 때는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말짱했다. 멀리 서산에 해가 잠기고 있었다. 나는 배가 고파 서둘러 식당으로 향했다.
김태희(다산연구소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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