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농의 아들… 학창시절 민주화운동 그리고 시작된 서민정치인 ‘인생 3막’
소년은 늘 ‘맨발’이었다. 모진 가난 탓이다.
매일 수십 리(里)를 걸어 집과 학교를 오갔다. 그래도 소년은 즐거웠다. 손에 쥔 것이라고는 다 헤진 국어책과 보자기가 전부였지만 배움이 있어 기뻤다. 꿈이 있어 좋았다. 9살 되던 해, 소년은 아버지로부터 검정고무신 한 켤레를 선물 받게 됐다.
소년은 혹시나 닳을까, 잃어버릴까. 소년은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것보다 손에 들고 걷는 일이 더 많았다. 별빛이 일렁이는 강가를 지나며 소년은 다짐했다.
“언젠가 높은 사람이 돼 부모님께 따뜻한 고깃국과 편안한 집을 마련해 드리겠노라”고. 그렇게 ‘맨발의 소년’은 가난을 딛고 국회의원 노철래(63)로 성장했다.
수줍음 많던 ‘맨발의 소년’, 시대에 항거하는 ‘학생운동’ 대표로
우연히 목격한 정치인 연설로 배운 ‘웅변’이 인생 바꿔
노철래 의원은 ‘6·25둥이’다. 충남 서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노 의원은 유난히 수줍음이 많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였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국어책 읽기라도 시키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곤 했다.
노 의원은 그 때 기억을 두고 “모든 것이 가난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동란 후 너나 없던 시절이었지만 헌 검정고무신 한 켤레 구해신지 못할 정도로 가진 게 없었다.
오죽하면 노 의원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던 지난 18대 총선 축하연 자리에 참석한 집안 어른이 “닭 똥 주워 먹던 꼬마가 국회의원이 됐다”고 너스레를 떨기까지 했을까.
헌 옷에 남몰래 주린 배를 물로 채워야 했던 소년. 노 의원은 “가난 탓인지 마음이 약했던 것인지 학교에 가면 항상 주눅이 들어 남 앞에 서는 것을 유난히 두려워했고 가슴이 떨려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던 아이였다”며 유년시절을 떠올렸다.
그 즈음 노 의원을 일약 학교 내 스타로 올려놓는 대형사건(?)이 발생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르겠으나 그 일은 분명 어린 노철래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노 의원이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로 기억한다. 여느 날처럼 20리(里) 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른 날과 달리 그 날의 장터는 유난히 시끄러웠다. 소리를 따라 장터 한 가운데로 가보니 그곳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 정치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울고 웃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정치인은 당시 ‘남장여자’로 이름을 떨쳤던 김옥선 전 의원이었다.
그 장면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좌중을 휘어잡는 박력과 패기,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와 호소력, 화려한 제스처까지. 일찍이 어린 노 의원에게는 없던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지금과 달리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편견이 팽배하던 때였죠. 그럼에도 그 벽을 넘어 가감 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데. 내가 가난하다고 해서 주눅 드는 건 핑계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웅변’이었습니다”
학교도 겨우 다니는 판에 웅변학원은 꿈도 못 꿨다. 대신 뒷산에 올라가 연습을 했다. 숲속의 나무와 바위, 꽃들을 청중으로 생각하며 이미지 훈련을 했다. 그 노력이 하늘에 닿았는지 노 의원에게 기회가 왔다. ‘조선일보 서천지국 주최 6·25 학생 웅변대회’가 그것.
당시 명문이던 군산상고에 재학 중이던 사촌 형에게 원고를 부탁했다. 그것을 들고 노 의원은 대회까지 하루 2∼3시간을 숲속에서 피나는 연습을 했다. 결과는 기대이상이었다. ‘중등부 전체 1위’. 그것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격동하는 현대사 중심에서 정치적 경험과 역량 키워
16대 총선 실패 후 서청원 전 대표 만남 통해 ‘정치 2막’
이후 노 의원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그 일을 계기로 자신감을 찾는 노 의원은 수 차례 웅변대회 수상은 물론 대학시절 ‘전국대학 웅변연합회 회장’ 자리까지 꿰차게 된다.
노 의원이 대학시절 유신정권에 대항해 ‘학생운동’을 한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중앙대 법대생(70학번) 신분으로 ‘사법고시’를 패스해 가난을 끊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정의를 향한 피 끓는 열정을 누르진 못했다.
1971년 ‘4·27 대선’에 이어 ‘5·25 총선 대학생 투개표 인단’ 참관, 부정선거진상규명 및 무효화 투쟁위 중앙대 대표를 지내는 등 활발한 학생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3개월 간 경찰에 쫓기다 대학생 2학년 시절 체포돼 군에 강제 징집됐다. 당시 ‘김신조 간첩단 사건’과 맞불려 입영 기간도 늘어나 만3년에서 14일 빠지는 35개월 16일을 복무해야 했다. 심지어 학생운동 탓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군 생활도 순탄치 못했다.
제대 뒤에도 노 의원은 사시를 보지 않았다. 대신 학생운동을 통해 알게 된 인연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정치 역시 법을 만드는 일인 만큼 전공도 살리고 국가에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정치에 관여한 터라 노 의원은 신민주공화당 청년국장부터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충남도지부장 사무처장과 선대본부장을 맡는 등 ‘YS’와 ‘JP’ 등 정치거물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이즈음 노 의원에게도 자신의 고향인 서천에서 2000년 16대 총선 출마 기회가 주어졌다. 총선에 앞서 사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경쟁후보를 크게 앞지르며 당선 가능성이 유력시됐다. 하지만 ‘IMF외환위기’가 발목을 잡았다. 조직 슬림화가 범국가 차원에서 진행되면서 노 의원이 출마한 지역구가 다른 인근 지역구와 합쳐진 것이다.
서천이 다른 지역구보다 투표자 수가 턱없이 적어 타 지역구 후보에 압도적인 차이로 밀리고 만다. 모아놓은 돈도 없던 터라 불확실한 싸움에 승부수를 던질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가족의 생계 걱정이 컸다. 결국 공천을 포기하고 노 의원은 훗날을 기약해야 했다.
“운을 탓했죠. 지금도 아쉬움이 많아요. 다행인지는 모르지만 이후 같은 고향 선배인 서청원 전 대표를 만나면서 새로운 정치 인생이 시작 됐습니다. 정치현안에 대해 상의하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이 시기 박근혜 대통령(당시 한나라당 전 대표)과의 인연도 시작됐다. 정치 스승이나 다름없는 서 전 대표가 박 전 대표를 지지한 이유가 크다. 물론 쉽지 않았다. 대학시절 유신에 대항해 항거한 노 의원이 박 전 대표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웠다.
무엇보다 서 전 대표가 함께 ‘함께 가자’고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됐지만 무엇보다 박 전 대표의 정치관이 노 의원을 움직였다.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 경선에 출마하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라는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 ‘실’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과 박 전 대표의 진심은 차별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 의원은 정치적 삶은 이후에도 10년이 넘도록 지속하고 있다. 친박연대 원내대표를 지내고 현재까지 전국 최대의 등산조직인 ‘청산회(淸山會)’를 이끄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광주지역 주민 숙원사업 ‘광주세무서’ 설치 등 지역발전 새 역사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지역 인프라 구축 예산 확보 ‘첨병’
2008년 미래희망연대 비례대표로 18대 총선에 출마해 첫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지난해 5월 19대 총선에서 25만여 명의 시민을 대표하는 경기도 광주시 국회의원으로 당선의 영예를 안게 됐다.
광주 지역에 특별한 연고가 없던 노 의원으로서는 이 지역 민심에 부응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지역 현안에 발 밧고 나서며 12개의 크고 작은 변화를 이끌어 내며 광주의 새 역사를 써나가는 작업에 여념이 없다.
그 중 하나가 광주시민의 염원이던 ‘광주세무서’ 설치다. 그동안 광주시에 세무서가 설치되지 않아 세무업무를 보기 위해 인근 지역의 세무서를 찾아가야 하는 등 시민들의 불편이 컸다.
노 의원은 정계의 폭넓은 인맥과 특유의 성실함을 기반으로 올해 기획재정부 심의를 거쳐 내년 상반기 정부 예산안에 반영되는 쾌거를 이뤄냈다.
여기에 ‘성남∼광주∼장호원’간 자동차전용도로 개통에 1천500억원, ‘성남∼광주∼여주 복선전철사업’에 3천600억원을 확보하는 등 지역인프라 구축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냈다.
더불어 광주 지역의 교육 인프라 강화 등 사회기반시설 확충을 위해 광주시 육아종합 지원센터 설치에 필요한 10억원의 국가예산을 올해 추경예산으로 확보했고, 오포초등학교 화장실 현대화 사업에 교육부 특별교부금으로 5억8천만원을 따냈다.
이 밖에도 ‘광주시 정수장 고도정수처리시설 설치 예산’과 ‘공공하수처리시설 신·증설사업 교부금 확보’ 등 굵직굵직한 지역 현안의 사업예산을 중앙정부로부터 확보해 내며 지역 경제 발전의 첨병 역할을 해오고 있다.
“수도권 동북권으로 보면 광주 지역은 각종 규제로 인해 낙후한 측면이 많습니다. 광주지역의 수려한 자연환경의 희생을 기반한 것이 아닌 청정산업을 주축으로 한 발전의 토대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광주시민이 저를 믿고 선택해 준만큼 부끄럽지 않은 정치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시작된 국회의원 노철래의 꿈은 제 2의 고향인 경기도 광주에서 여물어가고 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없는 서러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린 시절 초심의 기억으로 돌아가 광주 민생의 현장 곳곳에 발자국을 새기고 있는 ‘맨발의 정치인’ 노철래는 오늘도 걷고, 또 걷는다.
대담 _ 이선호 부장 lshgo@kyeonggi.com 글 _ 박광수 기자 ksthink@kyeonggi.com
사진 _ 전형민 기자 hmjeon@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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