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군 함성, 3ㆍ1운동으로 부활 日 조선점령 야욕에 맞선 ‘농민군의 큰 뜻’… 독립정신으로 승화
“반역죄를 용서하기는 어려우나 전부 우리 백성이니 우리 병사로서 토벌해야지, 만약 타국의 병사를 빌어 토벌하면 우리 백성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만약 청병이 들어오면 일본도 반드시 출병할 터 자칫하면 러시아병도 또한 들어와 장래 조선은 각국의 전장이 될 수도 있는 바이다.”
그러나 민씨 세도정치의 실세였던 민영준은 반대 여론을 누르고 청의 원세개에게 파병을 요청했다. 청과 일본은 조선에 대한 동시 출병권을 규정한 텐진조약에 따라 일본군도 곧 상륙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전봉준은 초조했다. 청군이 이미 개입하였고 일본군도 곧 출동한다는 소문은 들려오는데 북접 교단은 아직 가세하지 않았고 다른 지역의 호응도 미약했다. 홍계훈도 마찬가지였다.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함에 따라 서울 방어가 큰 문제로 대두됐으며, 농민군과 지구전을 벌여도 승산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전주화약 이후 여러 계통의 사람들이 농민군의 동정을 탐지하기 위하여 전봉준과 만나기 위해 전주성에 숨어들었다. 그 속에는 대원군이 보낸 사람, 일본사람도 있었다. 농민군은 변혁의 중심이 됐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를 살피던 농민군 지도부는 전주성 점령을 굳힌 후 곧장 서울로 진격하려던 원래의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청ㆍ일 두 나라에 군사 주둔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정부와 화약을 맺기로 하였던 것이다. 전봉준은 화약 조건으로 폐정개혁안을 내놓았다.
시간을 끌 수 없었던 홍계훈은 전봉준이 내민 27개 항의 폐정개혁안을 전부 받아들였다. 5월7일, ‘전주화약’이 맺어졌다. 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하는 대신 홍계훈은 농민군의 신변을 보장하고 폐정개혁안을 임금께 올린다는 조건으로 타협한 것이다.
전주화약 후 조선정부는 청일 양국에 철병을 요청했다. 6월 중순께 원세개가 오토리 공사와 회담하여 일본군의 철수를 요청하면서 청군도 철병할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일본은 “민란이 완전히 진정됐다고 말하기 어렵다”며 철군을 거부했다. 오히려 청ㆍ일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협상이 결렬되면서 두 나라는 계속 군대를 늘렸다.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과 담판을 벌인 끝에 전라도 행정권을 장악했다. 동학농민군의 영향력이 센 지역에서는 집강소를 쉽게 설치하고 과감한 개혁을 실행했지만 전라도 나주와 운봉, 경상도 예천 등의 경우는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는 향리와 유생들이 조직한 수성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전봉준은 금구현 원평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김개남은 남원을 거점으로 전라좌도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손화중은 광주와 장성 일대를 중심으로 전라우도를 장악하고 있었다. 7월 하순에는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이 제휴한 후 집강소 통치가 감사의 이름으로 공식 인정을 받게 됐다. 조선 500년 역사상 처음으로 농민이 자신의 힘으로 쟁취한 통치조직을 통해 스스로를 위한 정치를 시행했던 것이다.
한편 6월 하순, 일본군은 경복궁을 침범하여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내각을 세워 갑오경장을 추진하였다. 조선의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청일 두 나라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6월23일, 수원 부근 풍도 앞바다에서 청군과 일본군이 충돌했다. 청일전쟁의 서막이다. 7월1일에는 일본이 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우려대로 두 나라 군대는 조선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결과는 일본의 승리였다. 이제 일본은 조선을 삼키려는 본색을 그대로 드러냈다. 전봉준은 지방으로 통문을 돌려 7월 보름날, 남원에서 대집회를 열어 명령체계를 갖추고 내부로 번지는 동요를 수습하였다.
9월 초, 전봉준이 있는 삼례로 농민군 4천명이 모여들었다. 전봉준은 각지로 통문을 보내 군사를 불러 모았다. 이번은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한 구국전쟁이었다. 일본의 야욕을 간파한 농민들은 지도자 전봉준의 곁으로 다시 모여 들였다. 사방에서 농민군들이 몰려들었다.
‘서울로 곧장 올라가 권귀와 일본군을 몰아낸다’는 깃발을 내건 이들은 전봉준을 대장으로 손화중과 김덕명을 총지휘로 추대했다. 9월 중순, 최시형이 교도들에게 대동원령을 내렸다. 마침내 북접이 합류하게 됐다. 충청도, 경상도,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에 이르는 전국 각지에서 호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북접의 지도부가 진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함께 뜻을 모은 것은 9월 하순이었다.
마침내 10월9일, 호남 농민군과 호서 농민군은 논산에서 합류하여 공주로 진군했다. 농민군이 남북접간의 갈등으로 귀한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충분한 준비를 갖춘 관군과 일본군도 남하하여 공주로 모여들었다.
공주성은 서울로 진격하는 길목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공주성 전투는 사활을 건 싸움일 수밖에 없었다. 10월 하순, 농민군이 진군의 나팔을 불었다.
이인 전투를 시작으로 대교 전투, 곰나루 전투로 이어졌다. 그러나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관군 연합군은 이전과 달랐다. 공주 우금치에서 두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루며 분전하였다. 잘 훈련된 관군과 일본군의 신식무기의 위력 앞에서 무력했다. 농민군의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농민군은 공주성 앞에 있는 작은 고개 우금치를 돌파하기 위해 총을 쏘며 달려 나갔다.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끝내 우금치는 뚫리지 않았다. 조선의 자주자립을 도모하려 했던 동학농민군의 큰 뜻은 우금치를 넘지 못하고 말았다.
논산 황화 대전투, 금구 원평 구미란 전투에서도 끈질기게 항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구미란 전투를 치룬 이후 농민군의 전력은 바닥이 났다. 살아남은 농민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속속 체포됐다. 아래는 농두장군 전봉준이 체포되어 처형되기 전에 남긴 유시(遺詩) 운명이다.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 듯과 같더니[時來天地皆同力]
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구나[運去英雄不自謨]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랴[愛民正義我無失]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랴[愛國丹心誰有知]
동리 동리에 살기가 충전하고 유혈이 가득하였다. ……동학군으로서 관병, 일병, 수성군, 민보군에게 당한 참살 광경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오지영, 『동학사』)
그러나 농민군의 의기가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동학농민군들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어난 의병항쟁에 합류했고, 1900년대에 다시 의병으로 참전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국권을 잃고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후에는 3ㆍ1운동과 소작쟁의, 항일무장투쟁으로 이어졌으며 해방 후에는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3ㆍ1만세운동의 중심에 천도교와 의암 손병희가 있었으며, 백범 김구 선생이 동학농민전쟁에 참전하여 용맹을 날리던 소년 접주였다는 것을 통해 동학농민군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졌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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