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외세ㆍ보국안민 이념, 을미사변ㆍ단발령 대항… 국권수호 횃불로 타올라
1895년 11월 16일(양력 12월 31일)
을미년은 아직 한 달 보름 정도 남았지만 조선정부가 내일부터 양력을 써야 한다고 공포하였으니 1895년의 마지막 날인 셈이다. 어제는 바로 단발령이 내려진 날이었다. 궁궐에서는 농상공부대신 정병하가 고종의 상투를 자르고, 내부대신 유길준이 왕자(뒤에 순종)의 머리를 자르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이렇듯 왕실을 협박하여 위로부터 솔선수범하는 것처럼 하여 단발을 권유하였지만 유생은 물론 일반 백성에게 단발령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신체발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상하지 않게 함이 효도의 시작’이라고 배웠는데, 하루아침에 머리를 자르라니 될 말인가. 당시 유림의 거두 면암 최익현은 “차라리 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말하자면 머리를 깎는 것은 나라 망하는 것만큼 커다란 치욕이라고 생각하던 시대였다.
단발령이 내려진 다음날 이른 아침 서둘러 한강을 건너는 그림자가 있었다. 김하락·조성학·구연영·김태원·신용희 등으로 전현직 관료 혹은 재야 유생들이었다. 이들은 1896년 1월 1일(이하에서 모두 양력을 사용함) 이천에 도착하자마자 의병 모집에 착수하였다. 의병을 일으키기로 한 이유는 김하락이 쓴 진중일기(陣中日記)를 통해 살필 수 있다. 즉 을미개혁에 의한 국정 문란과 일제의 내정간섭, 전통문화질서의 파괴, 청일전쟁을 악용한 일제의 무력 침략, 관리들의 친일행태, 명성황후 시해, 단발령 공포 등을 봉기 명분으로 내세웠다.
“국가가 달걀 포개 놓은 것 같은 위기에 직면하고, 임금이 바늘방석 위에 앉은 것 같은 상황을 빚어낸 것은 모두 백성의 허물이다. 아! 우리 모두 동심동력하여 국가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도록 하자.”(의병장 김하락의 호소)
이천의 의병부대는 순식간에 대규모로 조직되었다. 양근·지평·남한산성·음죽·죽산에서 군사 900여 명을 모집하였고, 이천에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용인·안성·포천·시흥·수원·안산 등지에서도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호응하였다. 이들은 곧바로 경기도 연합의병부대 성격의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를 조직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거병 장소로 이천을 택했을까? 오로지 구연영과 방춘식 등 이천에 연고가 있던 인사들의 제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천은 일찍이 동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곳이다. 설성면 앵산동은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한때 은둔한 곳이기도 한데, 외세 배척을 부르짖은 보은집회에 동학교도 400여명이 참여할 정도로 이천 지역은 동학교세가 강했다. 또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천의 동학군은 부악산과 소정리, 장호원 부근에서 관군·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치렀을 뿐만 아니라 충청도의 보은·회인·공주 전투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이후에도 이천 지역에서는 동학군의 출몰이 끊이지 않았으며, 적도(賊徒)가 횡행한다는 일제의 표현처럼 의병봉기의 기운이 치솟고 있는 분위기였다. 결국 반외세와 보국안민을 주창했던 동학혁명의 이념이 그렇게 의병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천의병진의 절반 정도는 농민이었다. 대체로 당시 사회구조상 의병에 참여한 농민의 성격을 용병성(포수농민)·잠적성(동학농민)·종속성(소작농민)으로 구분할 때 이천수창의소의 의병부대에도 동학농민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넓고개에서 승리하고 배고개에서는 패배
1896년 1월 17일 이천수창의소가 의병조직을 마무리할 즈음 일본군 수비대 100여명이 공격해왔다. 의병진은 정규 훈련을 받은 군대가 아닌 점을 고려하여 복병전으로 대항할 것을 결의하였고, 백현(魄峴)을 중심으로 산골짜기에 매복한 채 일본군을 기다렸다. 백현은 오늘날 광현·넓고개·넋고개·넉고개 등으로 불리는 곳으로 광주와 이천을 넘나드는 고개를 말한다.
18일 이른 아침에 조성학이 백현 아래에서 일본군과 두어 시간 격전을 벌이다가 작전대로 퇴군하였다. 마침내 백현에 이르렀을 때 의병진은 매복한 동료과 함께 적을 포위하고 사방에서 협공하여 적병 수십 명을 살상하였으며, 일본군이 도망하자 광주 노루목 장터까지 추격하였다. 이 넓고개 전투의 승리는 이천의병진의 첫 번째 승리이자 전국을 통해서도 첫 번째 ‘대규모’ 승리였다.
넓고개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 수비대는 2월 12일 새벽 200여명의 병력으로 재차 이천을 공격하였다. 전투가 벌어진 곳은 이천의병진의 본진이 머물던 이현(梨峴; 배고개)이었다. 하루 종일 우레와 같은 총소리에 탄환이 우박 쏟아지듯 하며 전투를 벌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두어 시간 동안 싸움을 벌였는데, 10시 쯤 되자 서북풍이 불고 눈이 내려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다. 의병진은 눈보라를 안고 싸우는 바람에 형세가 점차 불리해졌고, 끝내는 훗날을 기약하며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창의대장 민승천은 죽산으로, 구연영은 원주로 떠났으며, 나머지 장졸들도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때 의병진을 다시 수습하는 데 노력한 인물이 김하락이었다. 그는 민가에 잠시 기숙했다가 여주의 심상희 의병장을 찾아가 부대를 이천으로 옮겨 큰일을 도모하자고 설득하였다. 또한 각지에 격문과 통지를 보내자 흩어졌던 의병장들이 남은 군사를 이끌고 이천으로 모여들어 의병진의 기세가 다시 높아졌다. 다만 이현 전투 패배로 인해 ‘패전한 장수는 다시 등용할 수 없다’는 의견에 따라 민승천 대신 박주영(혹은 박준영)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천수창의소가 재차 조직 정비를 마무리할 즈음 남한산성 의병부대로부터 급한 지원요청이 있었다. 즉 심진원이 이끄는 의병진이 남한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관군이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있으므로 함락될 우려가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천 의병진은 곧바로 출격하여 관군의 포위망을 뚫고 산성으로 진입하였다. 이제 산성 의병진은 심진원의 광주의진, 박주영의 이천의진, 이석용의 양근의진 등 1천600여명에 달하였다. 곡식과 소금도 산더미처럼 쌓였고, 대완기·불랑기·천황포·지자포·천보총·조총과 탄약·철환 등도 충분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은 ‘사방 산이 깎아지른 듯이 솟고 성첩이 견고하여 참으로 한 사람이 문을 지키면 1만명이라도 열고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는 김하락의 기록처럼 지정학적으로도 전투하기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이 무렵 일제는 친일세력을 위협하여 관군과 수비대 800명을 남한산성에 파견한 반면, 의병진에서는 춘천에서 600여명, 광주 분원 1천200여명, 공주·청주 600여명이 합세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처럼 의병부대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면서 다음과 같은 4단계의 서울진공작전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①수원 근방 의병진들이 연합하여 수원 점령
②남한산성 및 춘천·분원·공주·청주·수원 의병이 남한산성 주변의 관군·일본군을 협공하여 격파
③삼남지방 의병과 합세하여 서울 진격
④일본군을 몰아내고 고종의 환궁 도모
그리하여 안성·평택·온양·목천 등지의 의병진이 가세하여 수원을 점령함으로써 1단계 작전에 성공하였고, 춘천의병 1천200여명이 양근에 도착하여 그 중 200여명이 광주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이같이 의병 측이 우세한 상황에서 추진되던 서울진공작전은 갑작스러운 남한산성 함락으로 실패하게 된다. 김하락은 진중일기에서 ‘관군이 이천수창의소의 김귀성과 박주영에게 각각 수원유수와 광주유수 자리를 준다고 회유하여 이들이 의병들에게 술을 먹이고 성문을 열어놓았기 때문에 손쉽게 성이 함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인해 서울진공작전이 무산된 것은 물론 의병진도 커다란 타격을 입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상에서 본 이천수창의소의 활동은 비록 최종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한말 의병전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즉 단발령 공포 이후 초창기 의병전쟁을 주도한 점, 경기도 여러 지역의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작전을 전개한 점, 처음으로 대규모 서울진공작전을 수립하고 추진했다는 점 등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김명우(문학박사, 경기문화재단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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