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적 대립ㆍ지자체 갈등… ‘동학혁명 상징일’ 확정못해
동학혁명의 상징일은 객관적 기준에 입각한 공평무사한 택일이 되어야 하며 그렇게 선택된 일자가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비로소 공인된 국가기념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아직도 동학혁명의 상징일의 기준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도 정해지지 못한 수준에 있다.
즉, 기념일 제정의 기준점을 동학혁명의 시작점에 두어야 할지 아니면 동학혁명의 전승일에 두어야 할지, 또는 특정한 상징물을 염두에 둔 상징성에 두야 할지 등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동학혁명이 진정한 국가기념일로 제정되기 위해서는 우선은 어떠한 선택의 기준을 둘 것인가를 먼저 확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 기준점 설정에는 그 기념일이 갖는 역사적 사실은 물론 상징성과 대표성을 갖추어야 하며 나아가 전국성(대중성)과 현재의 의미를 주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현재성까지도 고려되어야 한다.
황토현 전승일과 무장기포일의 대립, 고부봉기일과 우금치 전투일도 논란
특별법 제정 이전부터 동학농민혁명유족회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하 재단)에서는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기념일 제정과 관련한 학술대회와 공개 토론회를 열어왔었다.
그 결과 많은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바탕한 주장과 문제제기 등으로 상당한 진척을 보아 왔지만 상징일을 어떻게 정할지에 대한 합의에는 이르지를 못했다. 또한 관련 지자체들 간의 고장의 정체성과 관련된 경쟁으로 심화되면서 문제는 더욱 확대되었다. 특히 무장기포설(3월20일 이하 모두 음력일)을 주장하는 전북 고창군과 황토현 전승일(4월7일)을 주장하는 정읍시의 대립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대립에는 학자들의 이견까지 충돌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장기포일은 고부에서의 봉기(1월10일)가 민란 수준이었으며 곧 실패하였고 전봉준이 당시 호남의 대접주였던 손화중을 끌어 들임으로써 동학혁명이 성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는 점을 전제한다. 특히 무장포고문을 발표함으로써 혁명의 대의를 표명했고 그것을 통해 동학교도나 일부지역에 머무는 것이 아닌 혁명의 전국화(실제는 호남화)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무장기포일의 중요성은 학계에서도 그동안 꾸준히 논증되어 왔었다. 그래서 그 실체의 명확성은 물론 포고문의 의의와 역할도 평가되고 있다.
실제로 재단 역시 그동안의 토론회에서 무장기포일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의견접근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대중적 인식과는 별도로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연구에서는 무장기포일이 동학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날임을 들어 기념일로 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무장기포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낮은 인지도와 함께 과연 고부봉기와의 연계없이 독자적인 동학혁명의 시작이었느냐는 점의 먼저 규명되어야 한다.
황토현 전승일의 의의가 인정되었기에 황토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건립된 기념물 ‘갑오동학혁명탑’이 건립되었다. 해방이후 학계의 전문가들이 황토현전승지를 지목했다는 것은 동학혁명사에 있어서 황토현의 상징과 역사를 고려한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지역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자리하고 있어 가히 동학농민혁명의 메카라는 점도 강조한다. 그러나 동학혁명의 의의와 가치가 황토현전승일에 담기에는 너무 크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밖에도 동학혁명의 상징일이 될 수 있는 날은 고부봉기일(1월10일)을 들 수 있다. 고부봉기일은 여전히 민란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동학혁명의 시발점임은 분명하다. 고부에서 시작된 혁명의 열기는 무장과 백산대회 등으로 이어졌고 그 지도부와 조직 등이 확대발전 되어 나갔다. 그러므로 고부에서의 항쟁은 동학농민혁명의 최초 봉기일이자 혁명의 성격을 드러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는 평가이다. 더욱이 고부에는 만석보, 말목장터, 고부관아 등이 남아 있어 그 상징적 의미도 매우 크다. 그러나 여전히 고부의 거사가 봉기의 수준을 넘어서 혁명에까지 이르렀는가가 규명되어야 한다.
11월9일의 공주 우금치 전투일 역시 동학혁명의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날이다. 동학군 최대의 패배 우금치는 비록 패배지였지만 동학혁명을 미완의 혁명으로 명명한다면 그 혁명의 연장과 계속성을 위해서도 우금치 전투일을 기념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금치 전투를 계기로 반봉건 반외세의 동학혁명은 통한의 막을 내렸고 이후 급격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다시는 역사의 치욕을 되풀이 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우금치 전투일보다 더한 기념일은 없다는 주장이다. 또한 동학혁명이 지나칠 정도로 호남지역에 국한시키는 것 보다는 그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전국적으로 지평을 넓힌다는 의미에서 우금치 전투일이 적일이라고 본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이 전투로 인해 동학군의 급속한 종료와 함께 한 겨울에 대부대를 이끌고 고지를 공격한 지도부의 무능을 드러낸 전투라는 비난도 있기에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성이 축소될 위험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동학혁명의 2차기포를 여는 9월의 삼례기포와 9월 18일 해월 최시형에 의한 청산기포 역시 중요한 기념일 후보일자들이다. 그러나 삼례기포일은 아직도 정확한 일자가 확정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청산기포는 해월의 기포령에 의한 남북접의 대동단결에 의한 총기포였으며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를 기치로 대일항전을 명백히 하고 있기에 동학혁명의 총결산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학혁명의 전국화 의미에 가장 근접할 수 있는 상징일이 되기에 충분하다. 동학혁명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전라도를 넘어서 경상도와 충청도, 강원도, 황해도 그리고 경기도 지역까지 동시에 같은 구호를 외치며 같은 목표를 향해 전민중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20번째 동학혁명을 기념하면서도 여전히 특정한 날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원인은 전술한대로 동학혁명의 상징일에 대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일을 기준점으로 둔다면 단연 고부봉기와 무장기포 사이의 오랜 논쟁이 종식되어야 한다. 전승일로 동학혁명기념일의 기준점을 둔다면 황토현전승일을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패퇴일로 동학혁명기념일의 기준점을 둔다면 우금치 전투일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두 특정한 상징과 영역만을 만족시키기에 동학혁명의 전체를 아우를 수 없다.
다행인 것은 금년도의 기념일을 10월11일(음력 9월18일)로 잡았다는 것이다. 비록 천도교단과 재단 그리고 유족회만의 합의이지만 관련 지자체와 사업회들 나아가 관련 연구자들까지의 합의도출로 이어져야 한다는 과제를 남겼다. 그러나 남은 길이 멀고 험해도 120년 전 동학의 정신으로 들고 일어선 선조들의 뜻과 의의를 생각한다면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임형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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