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기가 휘날리고 풍선들이 터지고, 그래서인지 아침부터 운동화 끈을 매는 손길이 떨리고 가슴도 두근반 세근반 두근거리고….
어렸을 적 운동회에 대한 추억이다.
모두가 마음의 벽을 쌓고 사는 도시인들에겐 고향에서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릴 때면 김밥을 나눠먹고 까불고 아무런 뜻도 없이 수다를 떨던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그래서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대단위 아파트에서 이같은 운동회가 매년 열리고 있다면 믿질 않는다.
그것도 시골의 자그마한 아파트가 아닌 1천세대가 넘는 아파트에다 시공회사들도 네군데로 나뉘어져 있다면 더욱 그렇다.
이처럼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훈훈하고, 정겹게’ 살아가는 아파트가 있다.
인천시 연수구 동춘2동 무지개마을 아파트.
서해안의 이름없는 포구였던 이곳에 지난 96년 8월 아파트가 들어섰고 지난해 인천도시지하철 종착역인 동막역도 건립된 전형적인 도심.
“처음 입주해보니 무척 서먹서먹하더라구요.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시공회사별로도 정서가 틀린데다 단지가 워낙 넓다 보니 마음들도 썰렁해질 수 밖에 없더라구요.”
입주자 이모씨(39·공무원)의 설명이다.
이 아파트 총세대수는 1천68세대. 16개 동(棟)에 인구만도 4천명이 넘는다.
단지가 넓다 보니 관리사무소로 상가 입점 등을 위해 뻔질나게 로비들이 들어왔다.
아침이면 서울로, 일산으로, 분당으로, 중동으로, 인천으로 뿔뿔이 헤어졌다 밤 늦게 들어와 잠깐 눈만 붙이고 또 나가야 하는 가장(家長)들이 제일 먼저 어깨를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일을 저질렀다.
여늬 아파트들처럼 전형적인 베드타운으로 전락해선 안되겠다는 중지가 모아졌다.
현재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이영한씨(45·교사) 체제는 이렇게 출범했다.
지난 98년이었다.
제일 먼저 시작한 작업이 예산 공개였다.
“입주자대표회의에 대한 불신이라고 할까, 이를테면 하는 일마다 색안경 끼고 보는 것 있잖습니까.”
내친 김에 관리사무소와 함께 관리비 절감에 혼신을 기울였다.
볼펜도 껍데기는 재활용하고 심만 교환하거나 이면지로 복사하고 불필요한 서류는 과감히 없애고 전화통화기록부를 비치해 전화사용료를 최소화하고 냉난방시간을 단축하고 물탱크청소비나 소독비, 청소비, 엘리베이터 유지비, 위탁관리비 등은 철저하게 공개입찰을 통한 최저가 낙찰로 용역을 의뢰했다.
그래서 그해 1억여원을 절감했다.
“부녀회나 노인회 등의 협조가 없이는 다 불가능했던 일이죠.”
입주자대표회의 총무 조성행씨(42·자영업)는 “남편들이야 늘 바깥에서 생활하다 보면 집안일에 소홀해질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어서 아내들과 노인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관리비 공개는 불가능했다”고 강조했다.
두번째로 시작한 게 아파트 운동회였다.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얼굴을 맞대고 지내니 사실은 아주 가까운 이웃인데도 1년이 가도, 2년이 지나도 눈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니 어디 사람 사는 곳이야.”
노인회장 박규영옹(69)은 젊은이들이 체육대회를 열자고 제의, 아주 흔쾌히 동의해준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막상 운동회를 개최하려 의견을 모았지만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경비도 그렇고, 프로그램도 그랬고, 얼마나 많은 입주자들이 참가해주려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선뜻 확신이 서지 않았다.
우선 경비는 1천만원으로 정하고 부녀회원들과 밤을 새다시피 했다.
꼬박 1개월이 걸렸다.
마침내 지난 99년 가을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을 빌려 체육대회를 열었다.
‘청군’, ‘홍군’, ‘황군’, ‘백군’으로 나눠 달리기, 줄당기기, 축구, 족구, 배구 등을 진행시켰다.
운동장에 나와준 주민들은 전체 4천여명중 25%에도 미치지 못하는 700명∼800명.
“첫술부터 배가 부를 수 있나요. 그 정도면 성공이라 자위하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주민들을 운동장으로 부를 수 있을까 궁리했죠.”
이명옥 부녀회장(42)과 회원들은 어깨에 힘들이 빠진 남편들을 오히려 두들겨줬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난해 10월25일 열린 두번째 운동회는 대성공이었다.
2천여명이 한나절 꼬박 부대끼고 엉키면서 햇볕에 그을렸다.
서로가 서로를 이웃으로 자리 매김하는 잔치였다.
떡도 빚고 지짐도 부치고 생선회도 뜨고 물김치도 담그고 수정과도 띄우고, 풍물패의 흥겨운 장단도 즐겁고….
“체육대회가 열리는 동안 이웃 아파트 주민들까지 구경와 무척 부러워하더라구요.”
한 부녀회원은 체육대회 하나만큼은 노하우가 쌓여 자신이 있지만, 경비 1천만원과 1개월의 시간을 준다고 아무 아파트나 이같은 이벤트를 열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아파트 운동회를 열면서 거둔 가장 소중한 소득은 ‘단결’과 ‘화합’이다.
“저희 단지에선 웃음꽃이 항상 핍니다. 놀이터에서 만나도, 상가에서 부딪쳐도 이젠 다들 눈인사라도 나누는 게 저희 아파트입니다.”
관리사무소 여직원의 귀띔이다.
이들은 또 한번의 ‘도전’을 준비중이다.
4천여 이웃들이 사이버공간에서도 만날 수 있도록 홈페이지를 만드는 일이다.
“곧 선을 보일 겁니다. 다른 아파트들보다는 늦었지만 지켜봐주세요.”
관리사무소 앞 화단으로 따뜻한 햇살이 내려 앉고 있었다.
/허행윤기자 heohy@kgib.co.kr
<이명옥 부녀회장 인터뷰>이명옥>
무지개아파트 이명옥 부녀회장(42)은 누구보다 자신감이 차있는 여성이다.
회원들과 함께 입주자대표회의를 도와 관리비 1억여원을 절약하는 성과를 거뒀기 때문일까.
외지 상인들이 아파트에 들어오지 못하는 까닭도 아파트에 호랑이같은 ‘내무장관’이 버티고 있어 오금이 저릴 정도다.
-관리비는 어떻게 아꼈는지.
▲우선 손쉬운 일부터 시작했죠. 그동안 지켜 보니까 정화조 청소라든가 엘리베이터 청소 등의 업무가 두리뭉실하게 특정 업자들에게 위탁되더라구요. 결과는 물론 성의가 없으니 말끔하지도 않구요. 그래서 입주자대표회의에 건의했어요. 공개경쟁을 통해 최저가 입찰방식을 채택하자구요. 앞으로 계획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더 줄일 계획입니다. 못할 게 뭐가 있겠어요.
-아파트 관리에 주부 특유의 알뜰함과 섬세함이 도입된 것인지.
▲국가경제의 초석이 가계에서 비롯되지 않습니까. 아파트 살림도 결국은 입주자 몫 아니겠어요. 아파트 일을 바로 내일이라고 생각하고 바짝 달라 붙었어요. 아마 그게 주효했나 봐요.
-홈페이지는 어떻게 꾸밀것인지.
▲현재 90% 정도 진척됐어요. 저보다는 컴퓨터를 잘 아는 주부들 도움이 크죠. 초기화면 디자인이나 배너나 색상 등을 뭔가 특색있고 예쁘게 꾸밀 작정입니다. 그리고 홈페이지가 개설되면 이웃들의 사소한 얘기들을 모두 담으려고 해요.
<이영한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영한>
전국 최초로 아파트 운동회를 두번째로 개최해 온 이영한 무지개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회장(45)은 누구보다 ‘이웃사랑’을 위한 의지가 깊은 편이다. 교단에서도 제자들에게 늘 사랑을 강조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기도 하다.
-도회지에서, 그것도 아파트에서 체육대회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파트도 따뜻한 가슴을 지닌 이웃들이 사는 곳입니다. 다만 삭막한 콘크리트에 둘러 싸여 지내다 보니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궈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누군가 손짓만 하면 금방 창문을 열어 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니겠어요.
-학교 체육대회도 어지간하면 참석하지 않으려 하는데.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동 대표들이나 부녀회원들이 고생하는 걸 보고는 아주 오랫동안 그랬던 것처럼 스스럼 없이 운동장으로 나와들 주셨습니다.
-동(棟)이 16개이면 회의를 하려 해도 만만찮을텐데.
▲운동회를 두번씩 치루니까 이젠 서로가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이젠 아파트에 사는 게 아니라 어릴 적 시골마을에 사는 착각이 들 정도로 정겹습니다.
-또 다른 계획이 있다면.
▲부녀회가 주도하겠지만 아파트 홈페이지를 개설하는 일입니다. 사이버공간을 통해 청소년들과도 대화하고 노인들과도 말씀을 나누고 알뜰장터도 만들어 번거롭지 않게 생활용품들을 교환할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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