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히도 천황은 퇴위 의사를 밝히면서 일본에 전쟁의 참화가 반복되지 않기를 염원하고 천황의 지위가 국가의 명목적인 상징으로 유지되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아키히도 천황은 스스로 퇴위를 결정한 배경은 고령과 건강상의 이유를 내세우고 있으나 천황이 밝힌 상징적 지위의 유지에 대한 희망이 전례에 드문 퇴위를 결심한 숨겨진 동기로 보는 시각이 있어 흥미롭다.
천황의 퇴위 결심은 아베 총리가 주도하는 평화헌법의 개헌안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우회적으로 표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일본 자민당의 홈페이지에 제시된 개헌 초안을 보면 천황의 지위를 국가의 상징적 존재에서 국가 원수로 격상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키히도 천황은 아베 총리가 추진하는 일황의 국가원수적 지위보다 현행 헌법상의 상징적 지위를 선호하는 입장을 보이는 것이다.
일왕이 퇴위의사에서 밝힌 일왕의 상징적 지위의 유지 희망은 과거 일본 제국 헌법상 천황이 국가원수였던 군국주의 시대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패망으로 귀결된 역사를 염두에 두고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지를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의 역사에 나타난 일왕의 지위는 변천을 보여왔다. 8세기 중앙집권적 국가시대까지는 일왕은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가졌으나 이후부터는 천황이 존재하나 후지와라 가문, 다이라 가문 등이 정권을 장악해 일본을 이중 지배하는 구조가 시작됐다. 막부시대에는 정신적인 권위는 천황과 조정이 가졌고 정치적 권력은 쇼군과 막부가 행사하는 ‘권위와 권력의 이중구조’를 보여준다. 명치유신에서 명치 천황은 다시 국가원수로서 국가 최고 통치권자로서의 지위를 회복한다.
그러나 명치 천황도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스스로 정치적, 군사적 힘으로 회복한 것이 아니라 명치유신을 주도해 나간 유신관료 그룹이 중앙집권적 통일국가의 형성을 위해 막부를 타도하고 권력을 천황에게 되돌려준 것이다. 천황의 국가 원수로서의 지위를 회복시킨 주체가 관료ㆍ군인 그룹이었던 관계로 이후 천황과 총리는 또 다른 형태의 이중권력구조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명치유신부터 제2차 세계대전 패전까지 최고통수권자인 천황이 국정을 결정하는 최종 권한을 행사한 것처럼 보이나 이는 관료ㆍ군인집단이 국정의 중요한 내용을 사실상 결정한 후 천황의 재가라는 형식과 절차를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권력의 이중구조는 관료그룹이 천황의 권위를 배경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국민에게 강요하는 문제점이 있으므로 아키히토 천황이 천황의 지위가 군국주의 시대를 연상케 하는 국가원수로 격상되는 것보다는 국가의 명목적 상징으로 남아 있기를 희망하는 배경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키히토 일황의 자발적 퇴위는 일본의 이중 권력구조하에서 일왕이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는 방법으로 강구되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신길수 前 주그리스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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