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운전자회 수신호만 법적으로 인정
나머지 봉사는 도로법상 모두 非法 행위
운전능력 보편화된 시대에 안 맞는 법
직장인 A씨가 경험한 억울한 사연이 있다. 지난 6월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던 중 접촉 사고가 났다. 학교 앞 도로에서 녹색 어머니회원의 지시에 따라 좌회전을 하다가 직진 신호를 보고 달려오던 차량과 충돌했다. 경찰에서 A씨는 피의자가 됐다. 4월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다중 행사를 위해 해병 전우회원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차량 한 대가 신호를 따라 멈췄지만, 뒤따르던 차가 추돌했다. 보험사에서 책임자로 지목된 건 해병 전우회원 지시를 따른 앞차였다.
녹색 어머니회, 해병 전우회 등의 교통 통제는 일상화된 모습이다. 모든 운전자들이 당연히 따르고 있고, 그게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이게 법률적으로 아무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법률이 그렇다. 현행 도로교통법은 도로를 통행하는 보행자 또는 차량의 운전자에게 교통 지시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경찰 공무원과 모범운전자, 헌병, 소방관으로 특정하고 있다. 나머지 교통 봉사자의 통제에 대해서는 어떤 권한도 주지 않고 있다.
교통 통제 권한의 남용을 막기 위한 법 취지로 보인다. 그런데 현실이 그렇지 않다. 경찰, 모범운전자회만으로는 교통안전 활동이 불가능하다. 경찰서 한 곳이 보유하고 있는 현장 교통관리 인원은 많아야 3개 팀, 12명 정도다. 많게는 수십 개에 달하는 관내 학교에 배치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하절기 폭우나 동절기 폭설로 현장 수요가 늘어날 때는 단 한 개 학교에도 배치할 수 없다. 그래서 보조적 역할을 부여한 게 모범 운전자회라는데.
이 역시 턱없다. 경기 남부 지역에서 활동하는 모범운전자는 2천500명 정도다. 모두 택시 운행 등 생업에 종사하는 직장인들이다. 실제로 현장에 투입되는 연인원은 절반도 안 된다. 수천 개에 달하는 경기남부권 학교만 담당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여기에 봄 가을이면 하루가 멀다 하고 개최되는 각종 야외 행사까지 있다. 역시 많은 교통 봉사자들이 투입되는 현장이다. 그래서 동원되는 것이 학교 앞 녹색 어머니회, 행사장 해병대 전우회, 마을 앞 노인회다.
현행법이 교통 수신호의 권한을 국가와 민간으로 획정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모범운전자회는 국가 기관이 아니다. 민간 신분이기는 녹색어머니회, 해병대 전우회 등과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운전이 특별한 사람들의 특수한 기술로 여겨지던 시대도 아니다. 모범운전자회와 녹색어머니회ㆍ해병대 전우회의 법률적 지위를 구분해 놓은 것이 적절해 보이지도 않는다. 이래저래 현실과 맞지 않는 법이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법이고, 스스로 모순이다.
경찰도 법 개선 필요성을 말한다. “교통 봉사자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수신호를 따라야 할 최소한의 권한을 줘야 한다.” 교통 봉사자는 분명히 필요한데, 그 봉사자의 신호를 따르면 피의자가 되는 이 황당한 법 현실, 빨리 손봐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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