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동북지방 함경도 가는 길목…충신·열사의 고장
예로부터 동북지방 함경도 가는 길목…충신·열사의 고장
  • 최성일기자
  • 승인 2009.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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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의 역사
‘포천(抱川)’이라는 명칭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물이 없고 나가기만 한다’는 뜻이다. 이 고을은 삼국시대 초기 백제의 영역이었으나 고구려의 남하로 고구려 영토에 편입되면서 마홀군(馬忽郡)이라는 지명을 갖게 됐다. 통일신라 진흥왕 때 견성군(堅城郡), 경덕왕 때 청성(靑城) 등으로 불리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포주(抱州)로 개칭됐고 995년(성종 14년) 처음으로 ‘포천군’이란 지명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조선 태종 때 군현제 개편에 의해 ‘포천현’으로 명명된 뒤 1895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한성부에 편입됐다. 1896년 경기도에 속해진다.
1914년 3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영평군이 포천군에 편입되고 1945년 광복 이후 38°선 이북에 속하는 포천의 북부지역이 북한에 편입됐으나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한국전쟁 이후 모두 수복됐다. 1973년 포천면 탑동리가 양주군 동두천읍으로 분리돼 12면·87리로 구획됐다. 1979년 포천면이 읍(邑)으로 승격됐고 1983년 연천군 관인면이 편입되는 대신 청산면이 연천군으로 이관돼 2읍·11면·88리의 행정체제를 갖추게 된다.
2003년 10월19일 군에서 시로 승격돼 포천읍이 포천동과 선단동 등으로 분리되고 1읍·11면·2동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역사 속 인물

과 거
포천은 예로부터 동북지방의 함경도로 통하는 대로였다.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 왕래할 때 얽힌 여러 가지 일화들을 비롯해 마의태자와 궁예 등과 관련된 지명들도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경기북부를 대표하는 명성산을 비롯해 산세가 수려하고 깊은 강물의 맑은 정기를 받아 역사적으로 훌륭한 서예가와 문장가 그리고 정치가와 독립운동가 등 출중한 인물들이 많았다.
조선시대 서예가이며 문장가인 양사언 선생은 신북면에서 출생했다. 1540년(중종 35년) 유명한 ‘단사부(丹砂賦)’를 지어 성균관 진사에 뽑혔다. 선생은 세상에 뛰어난 재사로 식견이 높고 지조가 결백했다. 벼슬길에 올라 40년 동안 8개 명읍을 다스렸는데 선정비가 세워졌다. 글씨는 안평대군과 한석봉 선생, 김구 선생(조선시대 학자로 백범 선생과는 다른 인물) 등과 함께 조선시대 4대 명필로 불리웠다. ‘미인별곡(美人別曲)’과 ‘남정가(南征歌)’ 등의 작품들이 전해지고 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는 시조도 선생의 작품이다.
한음(漢陰) 이덕형 선생도 이 고장 출신이다. 영의정 이산해 선생의 사위로 포천군 자작리에서 태어났다. 양사언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580년(선조 13년) 이항복 선생과 같이 문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항복 선생 등과 협의, 명나라에 들어가 원병을 요청해 지원군 파견에 성공하는 등 능란한 외교정책을 펼쳤다. 1595년(선조 28년) 경기·황해·평안·함경 4도 부체찰사를 지냈으며 이후 우의정과 좌의정 등에 올랐다. 선생은 어린 시절 오성 이항복 선생과 절친한 사이로 지내며 생각지 못한 장난으로 많은 일화들을 남기기도 했다.
오성(鰲城) 이항복 선생도 이 고장이 낳은 인물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선조 13년(1580년) 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승지로 왕비를 개성으로 수행하고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 등으로 수행했다. 선생의 지혜와 계략 등이 누구보다 뛰어나 명과의 원군문제를 비롯해 왜(倭)와는 협상을 유도, 왜란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충의열사 유응부 선생도 있다. 절의를 꺾고 두 임금을 섬길 수 없어 죽음으로써 충신의 절개를 지킨 사육신의 한 분이다. 소흘읍 무봉리에서 출생했으며 성품이 강직해 세종과 문종이 사랑하고 중히 여겼다. 효성스러워 어머니를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몸을 아끼지 않았다. 벼슬이 재상자리에 있으면서도 청백해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렸다고 한다.
위정척사 의병장 면암(勉菴) 최익현 선생도 빼놓을 수 없다. 신북면 가채리에서 출생했다. 1866년(고종 5년) 경복궁 재건을 위한 토목공사로 백성들의 부담이 가중되고 당백전 발행으로 경제 파탄이 왔다며 대원군의 정책을 강력 비판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소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할 것과 조약 체결에 참여한 이완용·박제순·이근택·이지용·권중현 등 오적 처단을 주장했다.
근대로 들어와 이종일 선생을 꼽을 수 있다. 독립운동가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었다. 1896년 독립협회가 발족되자 참가했으며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를 조직, 민권운동에 앞장섰다. 1989년 제국신문(帝國新聞) 사장에 취임하면서 10년 동안 황성신문(皇城新聞)과 함께 일제의 침략정책을 공격하고 민족자주정신을 키우는 데 헌신했다. 1919년 3·1운동 때 자기 손으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민족대표 33인으로 활약했다.



현 재
포천이 배출한 인물들은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다.
우선 정계에는 국무총리를 지낸 이한동 전 국회의원과 오치성 전 내무부장관, 김용채 전 건설교통부 장관이 있다. 부장검사 출신의 고조흥 전 국회의원, 박윤국 전 포천시장에 이어 현역으로 한나라당 박종희 국회의원과 김영우 국회의원, 민주당 박선숙 국회의원이 있다.
이중효 포천시의회 의장, 이강림 전 포천시의회 의장, 이주석 도의회 행정자치위원장, 이우영 도의원, 이병욱 시의원은 지방자치 발전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학계에는 이경호 인제대 총장, 정동화 전 인천대 총장, 신용철 경희대 교수, 박문영 개원중학교 교장, 이보영 전 창덕여고 교장 등이 있다.
군에는 서경석 전 육군단장과 현역으로 이철휘 중장이 8군단장, 이진모 육군 준장이 사단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경찰에는 이병곤 전 부산지방경찰청장과 유태열 대구지방경찰청장이 현역으로 근무하고 있다.
체육계에도 국가대표로 두각을 나타낸 선수들이 많다. 대교에서 뛰고 있는 배드민턴 전재연 선수와 삼성생명 소속 배구에 김건환 선수, 서동철 선수가 국가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축구의 최용길 선수, 이영민 선수도 전 국가대표선수로 활약했다.
/포천=최성일기자 sichoi@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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