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평생 바른길만 걸었다
박 후보의 당선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정에서의 보수세력에 대한 실망감과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긍정적인 분위기가 각각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박 당선인이 주장했던 ‘지방적폐 청산’이 시민들의 표심을 자극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 선거결과로 인해 인천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먼저 남북, 북미 정상회담 이후에 펼쳐진 평화체제 속에서 박 당선인이 공약한 남북교류사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이외에도 원도심과 신도시의 균형발전1조원대 중소기업 육성자금 지원과 B-MeC 벨트 조성 등 미래산업 육성제2경인선 건설과 서울지하철 2호선 연장 등 인천 교통망 확충사람중심 복지 등의 대표 공약도 기대된다.
인천의 변화를 이끌어 갈 박 당선자가 걸어온 길을 돌아봤다.
■ 피난민의 아들… 어려운 이웃에 눈뜨다
과일장사 어머님과 인천 미8군 항만사령부 군무원 아버지.
박 당선인은 전쟁의 설움을 안고 황해도 은률에서 인천으로 피난 나오신 부모에게 각별한 애정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설 천주교 사립학교인 박문초등학교로 전학 하면서 자연히 천주교를 접했고 지금의 신앙생활을 하는 계기가 됐다. 동산중학교 2학년 때 쪽방촌 이웃 사람들의 팍팍한 삶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청소년적십자회(RCY)에 가입,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이것을 계기로 제물포고등학교 시절에도 RCY의 경기도 지역 중등부 회장을 맞아 농촌 봉사활동을 이어갔다.
제물포고 1학년 때에는 전통 운동서클인 야간농구부에 가입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수업이 끝난 후 2~3시간 농구를 했다. 심지어는 입시가 코앞이었던 고3 때도 그랬다. 친구들로부터 ‘조금씩 쉬어가며 해라’ 소리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박 당선인은 ‘인생은 마라톤 풀코스’라는 생각에 따라 체력 관리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을 때에는 모든 정신을 가다듬어 집중하는 전략을 세웠다.
박 당선인은 “운동으로 다져진 체력은 후배들과 비교해도 자신할 만하다. 체력이 바탕이 되어야 끈기 있게, 집중적으로 공부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운동을 통해 알게 됐다”고 말했다.
■ 서슬 퍼런 군사정권에 맞선 ‘원칙과 신뢰’
당초 법관이 꿈이었던 박 당선인이 고려대 법대를 다니며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시절, 한 교수님의 “미국 같은 선진국들은 법조인이 인정받는 시대에서 행정가들이 주도하는 행정국가로 바뀌었네. 우리나라도 조만간 그렇게 될 것이고 유능한 행정가가 되어 세계를 무대로 역량을 펼치는 것이 어떤가. 굳이 법관이 되에 작은방에서 한평생을 보낼 것인가?”라는 말씀은 진로가 바뀌는 계기가 됐다.
이 말씀을 계기로 부모님과 주변 친구들이 기대하던 법관의 꿈을 접고 행정가로 나서게 된다. 박 당선인은 22세에 1981년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수습사무관을 시작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행시 합격생 동기들이 선호하는 곳은 내무부와 경제관련 부처였지만 박 당선인은 비인기 부서인 해운항만청을 지원하며 바다 행정과 첫 인연을 맺었다.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면 나라가 설 수 없다(民無信不立)’
논어에 나오는 한 구절로 공직자가 국민의 신뢰를 받으려면 진실해야 하고 진실을 믿고 원칙과 소신에 따라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박 당선인은 ‘원칙과 신뢰’라는 공직 생활의 좌우명은 가슴에, 양복 주머니에는 사직서를 각각 품고 다녔다. 전두환 5공화국 시절, 해양항만청에서 엄청난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부산항 관내 공유수면 매립 업무를 맞았다.
당시 ‘살아있는 권력’으로부터 대통령의 형이 대표를 맡은 업체에 이권 편의를 주라는 압력을 받았다. 이 업체는 지역주민과 갈등으로 공사를 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대통령이 직접 해운항만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압력을 넣을 정도였다. 하지만 업체와 주민을 설득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절차를 밟아 9개월만에 문제를 해결했다.
■ 노무현 前 대통령과 ‘혁신바람’
국민의 정부 시절 해양부 근무 당시 국장 승진이 코앞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노무현(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장관으로부터 승진은 고사하고 총무과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노 장관의 설득력은 대단했다.
졸지에 온라인 업무처리와 지식 관리를, 조직 혁신도, 공정함과 신뢰도 함께 받을 수 있는 능력자(?)로 평가 받았다. ‘혁신’이라는 낯선 단어 앞에 처음 섰던 이날 서점으로 곧바로 달려가 ‘혁신’이라 쓰인 책을 한 보따리 구입했다.
노무현 장관과 맺어진 인연은 이후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과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인사수석(차관급)까지 이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람 사는 세상’의 철학을 공유했고, 이를 실현할 시스템을 배우고 경험했다. 특히 참여정부 인사수석 시절 박 당선인은 ‘삼다일공(三多一公)의 원칙을 갖고 임했다.
‘삼다’는 ‘다원(多源)’, ‘다청(多廳)’, ‘다로‘(多勞)’였으며, ‘일공’은 ‘공평무사(公平無私)’이다. 그는 이 같은 인사 원칙으로 인사 잡음을 봉쇄하고,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 고향 인천에서 다시 태어나다
19대 인천 남동구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부터는 인천과 남동구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박 당선인에게 인천은 단순히 정치를 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하는 삶의 터전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도림동(숫골) 과수원집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여전히 간석동에서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지역구에 논현경찰서, 남동우체국, 수인선 터널식 방음벽도 단계적으로 설치했다. 이 밖에도 남동공단은 최첨단 리모델링 단지로, 소래포구는 국가 어항으로 예비 지정되는 등 남동구 5대 숙원사업을 해결했다. 국회에서는 국회의원 특권 폐지 등의 성과를 인정받아 300명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한 4년 의정 종합평가에서 7위, 인천지역 1위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 크게는 소방안전교부세를 신설, 국가의 안전예산을 확충했고, 남동구 골목 골목에는 범죄예방 CCTV 시스템을 구축해 ‘안전이 곧 민생이다’라는 원칙을 실천하고 있다.
박 당선자는 더불어민주당 후보 경선 과정에서 상대 후보의 혹독한 검증을 겪었다. 하지만 경선에서 승리한 이후 경쟁 후보들을 모두 캠프 인사로 모셔 원팀을 구성하는 등 아름다운 경선을 실현한 바 있다.
유제홍·수습 이승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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